강요된 화해,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과격하다고 말하며 각광받았던 ‘이퀄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실상 나무위키를 통해 날조된 이 개념은, 그러나 “싸우지 말고 지내요” 같은 정서에 기대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억압과 차별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왜 싸움(Fight)을 평화(Peace)로 대체하자는 논리가 힘을 얻는가? 기울어진 기본 틀을 의심하지 않는 평화는 억압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의 ‘기본 값’을 긍정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큰 변화에 대한 거부를 평화로 간주한다. 이미 괄호 속에 전제된 불평등과 불합리가 균열과 충돌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이를 체제 내부로 흡수하고자 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질서를 짜고 만들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페미나치’(확장하면 ‘강성노조’)의 프레임을 씌우고 ‘순종적인 희생자’만을 인정한다. 안티-페미니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사실 한국사회의 여러 제반 문제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흔히 이를 ‘도덕’과 ‘교양’의 영역에서 이해한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해관계’ 문제다. 그렇기에 강요된 화해는 누군가에 대한 폭력과 같다. 페미니즘 반대자들은 젠더 이슈에 둔감한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젠더 권력에 대해 몸으로 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본능적으로 반발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20대 남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짐짓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있겠지만, 긴 시간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자신의 과거 문제 발언에 대한 비판 논쟁에 고소로 대응했던 사람, 세월호 희생자 추모 소설에 성적 대상화가 명백한 표현을 쓰고도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격분했던 사람 등도 문제가 큰 것은 마찬가지다. 기본 값이 틀린 사회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잘못된 상황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전략과 전술을 훈수 두는 이들에게 특히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안이한 생각은 변화를 늦추고 피해자를 양산한다. 명확한 태도와 따끔한 이야기를 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공론장을 파괴하는 아무 말 카오스명확한 근거를 가진 공론장에서의 논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자주 여러 장애물에 봉착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상황을 조장하는 것은 단연 ‘지식 셀럽’과 ‘방송’ 매체다. 사실에 근거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논리보다는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획득한 명망을 통해 권위가 부여되고 이것이 순환되면서 어느새 근거를 알 수 없는 권력이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극적인 ‘썰’, ‘과잉’ 서사, 시도 때도 없는 ‘직관’이 등장한다. 검증 없이 계속 제기되고 순환되는 지식 상품은 어느 순간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카오스로 공론장을 전락시킨다. 가짜 뉴스보다 어쩌면 더욱 경계해야 할 ‘가짜 논의’가 태어난다. ‘차별금지법 반대를 금지하는 것이 차별이다’, ‘여성혐오 텍스트를 공부하지 않는 것은 살균된 문화 디스토피아를 부를 수도 있다’ 같은 류의, 논의의 민주적 기본 틀을 붕괴시키는 논리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논의 구조 역시 교묘하게 숨어든 ‘괄호 안의 불의’다.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논박해야만 공론장을 지킬 수 있다. 그냥 넘어가지 말고, 헛소리에는 딱 그만큼의 대우를!전작 《프로불편러 일기》의 첫 번째 글 [일베, 새 시대의 야만]에서부터 신간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의 마지막 글 [‘과도한 PC함’이라는 허수아비]까지 저자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헛소리에는 딱 그만큼의 대우”가 필요하며, 사회적 공론 과정을 통해 가장 덜 폭력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비판과 규제(혐오 표현 금지, 차별금지법 제정 등)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 안 그러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공적 영역의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없다. 권력자가 아닌 만인의 자유를 위해 법 제도가 존재해야 하며, 그 바탕이 되는 시민적 합의를 위해 민주적 의사소통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 지식인, 비평가가 사회적 분업 속에서 갖는 역할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실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역할에 충실했던 젊은 비정규 마감 노동자의 분투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