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영,박산호 공저
[책읽아웃] 책을 번역하며 고민하는 것들 (G. 홍한별 번역가)
2022년 07월 21일
"번역 이야기를 한다는 건 내가 특정 언어와 언제 처음 사랑에 빠졌는지, 문학이나 과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디에서 기쁨을 길어내는 사람인지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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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불을 끄고 집으로 가던 길, 안 풀리던 문장이 조금씩 나아지던 순간에 했던 혼잣말들이 또 다시 눈처럼 소복이 쌓여갈 즈음 두 명의 여성 번역가가 편지로 대화를 나눠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주말에 고민하던 중 만약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한다면 반드시 이 친구와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메일을 보내려는 찰나, 편집자로부터 이 친구의 이름이 적힌 메일이 왔다.
그리하여 언제나 응원하고 애정을 보내던 번역가 친구와 작정하고 원 없이 번역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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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랜 세월 동안 아침에 책을 펴고 이국과 모국의 언어를 만지작거려온 여자들의 이야기랍니다. 혹시 받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_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인사말 '알고 보면 할 말이 많답니다'
서문이 너무 좋아 뒷 이야기로 넘어가는 책장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노지양 번역가가 쓴 인사말은 이 책의 전부를 축약해 놓은 글이다. 번역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번역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 그 과정에서 느끼는 희노애락. 그리고 오랜 시간 번역이란 길을 함께 해온 동료 번역가에게 느끼는 큰 애정과 안쓰러움.
우리가 익히 아는 좋은 책들을 번역해온 노지양 번역가와 홍한별 번역가가 나누는 이 편지글에는 번역의 숨은 행복과 고통이, 그리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다.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책.
동녘 출판사에서 진행했던 해님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 도서만 제공받았었는데 내부 사정상 마지막 책은 '자유 도서'로 내가 직접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고른 책이 이 책이었다..!!!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니.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제목이지? 게다가 저자가 저자가.. 번역가님들 잘 모르지만 나도 들어볼 정도로 유명하신 분들. '언어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라는 부제까지 엉엉 나 울어요 ㅜㅜ
번역가의 삶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언어를 다루는, 책을 만드는, 글을 쓰는 사람들. 정확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의 처우나 대우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그치만 돈이 꼭 최대치의 행복은 아닌 법.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성공과 행복이 있고 사람들마나 원하는 행복의 모양은 다르니까.
현지에서 살면서 숨겨진 작가의 훌륭한 작품을 운명처럼 발견한 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건 번역가의 궁극적인 로망이 맞지. 117쪽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느꼈다. 난 여전히 번역가의 삶을 동경하는구나.
내가 진정 원하는 궁극적인 로망이 위에 언급한 구절에 나와 있다. 이 책에서는 번역가의 멋진 삶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번역가의 현실, 프리랜서의 고민, 일하는 엄마의 어려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기 어려운 세계에 대한 기록 등등.. 어떻게 보면 번역가의 어두운 뒷모습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난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그리고 더 열렬히 그들의 삶이 좋아 보이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살짝 생긴다.
아래 구절들은 번역가의 삶에 대한 나의 로망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준 내용들.
저장 꾹꾹꾹.
사회적 경제적 보상이 많지 않은데도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건 어쨌든 글을 쓸 때의 기쁨 때문이 아니겠어? 이 자리에는 무슨 단어가 들어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딱 들어맞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의 짜릿함, 도무지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을 듯한 문장을 두고 끙끙대다가 키를 발견하고 스르륵 암호를 풀 때와 같은 상쾌함, 운 좋게 비슷한 소리가 나는 단어가 포개졌을 때 뜻하지 않게 생기는 리듬, 다른 색과 무늬의 천을 서로 대보며 잘 어울리는 천을 찾을 때처럼 단어들 사이의 어울림과 간섭을 탐구하는 과정. 원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스산함, 슬픔, 따뜻함, 고요함, 충격, 통렬함을 조심스럽게 내 언어로 어루만져 이루어내는 일. 거기에 속절없이 낚여버린 거야. 23쪽
이런 대담한 공감각적 이미지는 누구의 소행일까? 저자일까 번역가일까 궁금했어. 원문이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을 보면 번역가가 범인일 것 같지만, 만약 저자가 의외의 이미지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걸 아름답게 어긋난 상태로 남기려면 번역가가 용기를 발휘해야 했겠지. 100쪽
그런데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보다도 편집자가 ("잘 팔릴 것 같은 책이다" 혹은 "좋은 평을 받은 책이다"가 아니라) "이 책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이다"라고 소개하는 책에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더라고. 우리가 책으로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과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번역한다는 게 아니겠어? 그런 마음으로 편집자와 같이 책을 만드는 경험은 분명 즐거울 거고, 이 편집자는 내 원고를 소중히 다뤄주고 정성스럽게 좋은 결과물을 내줄 거라고 기대하게 되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면서 "그럼 한번 해볼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128쪽
단어와 단어 사이를 만지고 이(異)문화와 언어를 다루고 책을 만지는 이 직업에 대한 나의 로망은 이렇게 끝날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