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가 살아 생전 출판하기를 거부했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출판사에 투고까지 했다고 하는데 몇 십 년 후 다시 출판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초기작품이어서 글의 완성도가 낮아서 그런 게 아닐까 했지만 전혀 아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여러 예술가와 그들의 철학까지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을 보면 결코 미완성의 글은 아닌 듯 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글에는 호불호가 나뉘는데 번역이 좋아서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 참에 국내에 출간된 사라마구의 책들을 모두 완독해보고 싶다.
저자의 이력을 아니 읽는다곤 하나 1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를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뒤늦게 작가를 알게 된 통에 끊임없이 읽을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핑계만으론 가려지지 아니할 정도로 나의 무지는 실로 크다.
주제 사라마구의 유고작이라고 하기에 대체 이분이 언제 돌아가셨나 싶어 일단 당황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알고는 더 놀랐음은 물론이다. 스카이라이트는 최근에서야 세상에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초판 1쇄가 2021년 7월 14일에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썼다.
정확히 어느 시기라 단정하긴 힘드나 작품의 배경이 194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194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동의 시기라 칭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갓 벗어나 대혼란의 시기를 관통 중이었고, 합법적 선거로 당선시킨 히틀러와 나치당에 선동 당했던 지난날의 충격에서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를 두고 신음하기 바빴다. 도시 리스본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라자르’라는 이름의 독재자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인물(안토니오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지배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1940년대 후반은 이제 겨우 1/3 정도가 경과했을 뿐인 시기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품자니 어디에서도 근거를 발견할 길이 없을 듯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에 앞서 이미 암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전했다. 다분히 속도 내어 책을 읽는 편인데, 아무래도 입에 달라붙지 않는 외국 이름을 지닌 인물이 꽤 여럿 동시에 등장하다 보니 이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이들은 각기 독립된 가구를 이루었으며, 마치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간의 마찰 지점 또한 쉬이 발견되지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도시, 같은 주택가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었고, 인물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았던 소설이 늦게나마 출판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얼지가 난 궁금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아마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대는 영웅 외에도 다양한 존재를 만든다. 어떤 시대에 태어날 것인가를 정할 수 있었더라면 등장인물들은 굳이 격동의 시기를 택하지 않았을 거 같다. 각자의 처한 상황, 살아가는 모양새는 달랐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고만고만해 보였다. 딱 한 가정,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를 제외한다면 안정이 없었다. 저마다 자신이 속한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고, 가정을 불행의 근원인양 여기고 있었다. 상대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급기야 금기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나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제 엄마에게 강탈당하다시피하는 인물도 있었으며, 그를 탐탁찮아 하는 게 분명함에도 제 딸의 안위를 위한다며 직장소개를 부탁하는 부모도 있었다. 하나뿐이던 딸을 잃고는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형태의 가족 또한 등장했으니, 비록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제3 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나였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왠지 모를 불행의 기운이 나에게까지도 미치는 듯했고, 이런 상황에서 홀로 행복을 느끼는 건 혹 죄가 아닐까를 묻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모든 걸 스스로 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아벨의 입장이 어쩌면 나와는 가장 유사했다. 그는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며 모든 걸 경험으로 익혔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했으나 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실베스트르와의 대화는 그에게 깨달음보다는 공허함을 안겨다 주었으며, 왜 그리고 어찌하면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등에 대해 결코 눈뜨지 못한 채 작품 밖으로 사라지고야 만다.
스카이라이트(skylight)는 천장에 난 채광창이다. 채광창은 빛이 오가는 통로로, 그 곳을 통과한 빛은 주변이 어두울수록 더욱 환함을 뽐낸다. 시대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퍽퍽한 삶 또한 어둠에 가까웠다. 실베스트르의 말처럼 그들의 인생 중 스스로 택한 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떠밀림을 연속 겪은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도 하늘은 빛을 흩뿌린다. 지금 당장 획기적으로 삶이 나아질 리는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 터이나 그래도 희망을 품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지금은 사랑이라는 기초를 하나씩 쌓아 올려야만 하는 시기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무언가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이 표현이야말로 저자의 이번 작품을 가장 잘 말해주는 표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꼭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삶이 나름 풍족하고, 일상에서 부족이나 불안을 느끼지 아니하더라도. 그래도 사랑을 향하여 더 다가가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