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네 명의 저자가 펼쳐 보이는 나와 하루키와 음악 이야기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표적인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으로 대변되는 작가지만,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는 ‘작가’라는 칭호보다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애호가’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는, 대표적인 음악광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음악을 그저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대거 끌어들인다. 팝송이나 재즈 등 곡명에서 차용해 소설이나 에세이의 제목을 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틀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노르웨이의 숲》이 그렇고, 듀크 엘링턴의 명곡인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을 살짝 비틀어 제목을 만든 에세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또한 그러하다. 단순히 제목을 짓는 것뿐 아니라 소설에서는 마치 영화의 OST처럼 각 작품에 다양한 음악이 소개되고, 주인공들의 기억과 더불어 흐르고 있으며, 음악을 소재로 한 에세이도 무수히 많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라든지, 음식의 레시피를 소개하는 책이라든지, 에세이 등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면모, 스타일을 분석하는 책 들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정작 하루키의 분신과도 같은 음악이 그 자신의 창작물 속에 어떻게 스며들고 반영되었는가에 대해 조명한 기획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책의 탄생 배경이다.
스탠더드 재즈의 고전인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에서 가지고 온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이라는 도서명은 어찌 보면 하루키식 작명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이는 또한 본 도서의 콘셉트를 분명히 드러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당신’은 저자 네 명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는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나와 하루키의 이야기일 수 있고, 하루키와 음악 이야기일 수 있으며, 나와 음악 사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총 네 명의 저자가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다. 소설가 백영옥, 재즈평론가 황덕호, KBS 라디오 PD 정일서,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이 바로 그들이다. 많게든 적게든 하루키의 작품을 오랫동안 읽어 왔으며, 대체로 음악을 동지 삼아 인생을 걸어온 이들의 각기 다른 하루키와 음악 이야기는 비교해 가며 읽는 재미를 제공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하루키 문학과 하루키가 들려주는 음악의 정수를 맛보게 할 기회를 선사한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시금 그의 책을 펼치거나 음반을 걸게 될 테니까.
재즈부터 팝송, 그리고 클래식까지
하루키 문학을 가로지르는 다채로운 음악의 향연
총 네 장으로 구성된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은 재즈부터 팝송, 클래식까지 장르별로 음악을 다루기도 하고, 하루키 작품에 빗대어 저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먼저 소설가 백영옥은 그간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보여준 탄탄하고 자유분방한 필력과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을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발휘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하루키 작품은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위안을 얻는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수많은 작가의 책을 뒤로하고 그녀가 하루키 작품을 늘 찾게 되는 이유다.
새로이 찾아온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은 어느 날, 그의 부재를 견디다 못해 그녀는 낯선 섬에 하루키 소설 《양을 쫓는 모험》 속 ‘돌핀 호텔’을 찾아 나선다. 그때에도 습관처럼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그녀는 이를 두고 “익숙한 주인공과 익숙한 환경과 익숙한 주제가 낯선 공간을 편안하게 조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혹은 ‘천 번 이상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 서로 어느 위치에 누워야 잠이 잘 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연인’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그녀에게 하루키는 그런 존재다. 그녀와 하루키 이야기다.
영화 『위플래쉬』를 보면서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재즈에 대해 내뱉는 대사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떠올린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하지메가 경영하는 재즈바는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다. 하지메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 시마모토는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면 듀크 엘링턴의 「더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가 테마음악처럼 흐른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저자에게는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희귀한 소설에 속한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욕정’, ‘정념’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설 속 또 다른 주제라 할 수 있는 ‘악을 행하고 싶지 않아도 악을 행하는’ 것 역시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자신이 별 이유 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군가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절망하는 사람이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재즈 평론가 황덕호는 인상 깊게 읽은 하루키의 에세이 세 편(《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포트레이트 인 재즈》, 《잡문집》)을 바탕으로 재즈 뮤지션과 음악에 대한 보다 깊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름하여 ‘하루키 씨, 이 재즈 음반은 어떠세요?’ 장이다. 하루키는 대부분의 글에서 해당 글과 관련된 음반을 한두 장씩 추천하는데, 저자도 마찬가지로 재즈에 관한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강의를 하는 이력으로 자신이 식구처럼 여기는 재즈 음반들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한 번쯤 귀 기울일 만하다.
재즈 강의를 하면서 제일 난감할 때가 입문자들이 재즈의 ‘정의’에 대해 물어올 때라며 운을 떼는 그는 하루키가 그만의 방식으로 재즈를 정의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운’인데,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읽었던 ‘윈턴 마살리스: 뛰어난 뮤지션의 지루한 음악’을 함께 떠올린다. 하루키는 이 글에서 윈턴을 두고 그의 재즈는 너무도 자명하고 명백하여 ‘절박한 영혼의 욕구’ 같은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저자도 여기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윈턴을 흠이 없는 뛰어난 뮤지션으로 여길 수도 있음을 인지하며 재즈를 놓고 이처럼 다양한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분위기를 환영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혼란이 늘 위기를 맞고 있는 재즈에 그나마 에너지가 되어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하루키가 피아니스트 시더 월턴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칭한 것을 두고는 당혹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저자는 시더 월턴의 음반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은 후 월턴의 진면목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집에 있는 그의 음반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시더!』, 『스펙트럼』, 『섬씽 포 레스터』, 『나이마』 등의 앨범을 들어 나간다. 그럴수록 뭔가가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왜 그가 그간 무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들여다보게 된다. 뮤지션의 진면목을 찾아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다양한 음반을 통해 월턴과 다른 연주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불꽃을 경험한 후에,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린다. “그는 까다로운 조건에서 꽃을 피우고 향기를 퍼뜨리는 난蘭과 같은 연주자”라고.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고. 이는 모두 “하루키 씨의 좋은 글 한 편” 덕분이라고.
20년째 라디오 PD 생활을 하고 《365일 팝 음악사》 라는 방대한 저작을 탄생시키기도 한 또 다른 저자 정일서는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팝송이 어떻게 쓰였는지 들여다보고, 시대별 음악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 그가 사랑한 뮤지션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하루키처럼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글에 등장하는 곡만 찾아 들어도 하루키 문학의 정서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루키가 작품에 새겨넣은 음악은 다채롭기 그지없는데 특히 팝송은 그 분량에 있어서 재즈와 클래식을 압도한다. 저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제목이 된 노래부터 소설 속 주인공의 기억과 촘촘히 얽혀 있는 음악, 등장인물의 테마음악으로 기능하는 곡까지 치밀하게 나열한다. 한 예로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주인공은 오랜 세월 자신의 인생을 짓눌러 온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친구였던 아오를 찾아간다. 그는 성공한 자동차 딜러가 되어 있는데 두 사람의 대화 도중 엘비스 프레슬리의 「비바 라스베이거스」가 휴대전화의 벨소리로 흘러나온다.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한 세일즈맨인 아오에게 「비바 라스베이거스」는 아주 딱 맞는 노래일 수도, 아니면 조금은 안 어울리는 노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뮤지션의 표상이지만 이 곡은 그의 수많은 쟁쟁한 히트곡들 사이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진 노래이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한편 ‘하루키가 사랑한 뮤지션들’이라는 글에서 대표적인 팝가수 비틀즈에 대한 얘기는 어떨까. 의외로 하루키는 비틀즈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역시나 비틀즈의 노래들이 빈도나 의미 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노르웨이의 숲》이 있다. 가장 단적인 예로 나오코가 죽은 후 레이코가 와타나베를 찾아와 노래하는 장면을 드는데, 「노르웨이의 숲」을 비롯해 「히어 컴스 더 선」, 「페니 레인」, 「노웨어 맨」, 「헤이 주드」 등 두 사람은 마치 나오코를 보내는 진혼곡을 부르는 듯 수많은 비틀즈 노래를 목놓아 부른다고 말한다. 비틀즈의 노래들은 원래 그리 슬픈 음악이 아닌데 이 장면에서만큼은 더없이 애잔하다는 감상과 함께.
마지막 장은 클래식에 관한 장이다. ‘잡식성 리스너’라 할 하루키는 그의 작품 속에 클래식을 어떻게 녹여내고 있을까. 저자 류태형은 이를 위해 열세 권의 소설을 꼽았고, 마지막에는 중?단편에 등장하는 클래식을 짤막하게 소개한다.
하루키의 초기작 《1973년의 핀볼》에는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이 흐른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기분 좋게 맑게 갠 11월의 어느 날 오후’다. 저자는 “스웨터 하나를 덧입는 것처럼 계절에 온기를 더해”주기 때문에『조화의 영감』은 11월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곡이라 말한다. 유명도에 있어서는 『사계』보다 떨어지지만, 들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비발디 최고의 걸작으로 평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G단조 Hob.XVI:44다. 일본에서 학생운동이 한창인 시절, 스무 살의 ‘나’가 바리케이드용으로 쌓아둔 의자들을 빠져나갈 때 이 곡이 흐른다. 멜랑콜리한 정서가 특징인 이 피아노 소나타곡은 이 장면에서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연대감을 상실한 공허함, 그 여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근작이라 할 수 있는 《IQ84》는 소설의 구성에서부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에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흐른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앨범도 덩달아 높은 판매율을 기록한 일이 화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단순히 배경음악으로 자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루키는 왜 이 곡에 조명을 비추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즈를 좋아하는 그에게 이 작품에서 쏟아지는 관악 섹션은 커티스 풀러의 트롬본처럼 독창적인 빛을 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주역은 재즈와 마찬가지로 금관악기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마음보다는 육체에 영향을 주는 음악이다. 야나체크가 이 곡을 체조 페스티벌을 위해 작곡했음을 떠올린다면, 몸에 새겨져 떠오르는 악구에서 규칙성과 운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니버설에서 컴필레이션 앨범 동시 발매
작가 하루키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열쇠인 책과 음악을 동시에!
한편 이번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은 음반사 유니버설과의 협업으로 동명의 앨범을 동시에 발매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독자들은 단순히 텍스트만 읽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에 소개된 수많은 곡들 중에서도 저자들이 직접 선곡에 참여한 주옥같은 음악들을 들을 수 있다. 재즈 13곡, 클래식 14곡이 총 두 장의 CD에 담겼다고 유니버설은 설명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의 리스트 『순례의 해』 중 「향수」,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를 통해 익숙한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를 필두로 엘라 피츠제럴드, 듀크 엘링턴, 텔로니어스 멍크에 이르는 재즈 명연주자들의 녹음이 실려 있다고 한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책 중간중간 들어가는 감각적인 일러스트다. 인물, 배경 때로는 글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한 패턴 등의 일러스트는 각기 개성이 다른 네 편의 글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어떤 그림들은 곧장 하루키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픈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 주변의 자연,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것의 특징을 절묘하게 포착해 독창적인 색감을 입혀 작업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곽명주는 이번 도서를 위해 새로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일부는 그녀가 기존에 그렸던 것을 가지고 온 경우도 있다. 글을 보고 나서 작업한 게 아닌데도 희한하게 그녀의 그림에서는 ‘하루키적인’ 매력이 느껴졌고, 네 저자의 글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서로를 더욱 빛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