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 저
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N.H클라인바움 저/한은주 역
2020년 03월 23일
1984, 우리들과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신세계를 드디어 읽었다. 이 책은 작가 올더스헉슬리가 1932년 600년 후의 미래사회에 대해 예견하고 쓴 소설인데, 이런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그냥 요즘 나온 소설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멋진신세계 속 인간세계는 장기간 대전쟁 끝에 거대한 세계정부의 지배를 받으며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나는데, 출산이전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해당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조작된다. 산소공급량으로 뇌 능력을 조절하고 수면암시를 통해 세뇌 시키며 인간을 인간이 아닌 부품의 하나로 여긴다.
가족간 유대가 사라지고 불멸까진 아니지만 노화도 병도 근심도 없는 이 세계는 계속 유토피아라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된다. 죽음은 절대 무겁지 않은 웃고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이며 꽃과 책은 혐오해야하는 대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되며 자유와 쾌락, 통제만 남아있다.
야만인 '존'이 포드 시대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고립되어 자살을 선택했듯, 멋진신세계 속에서 같은 야만인으로 분류될 나 또한 이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니가 없는 그들에겐 당연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라 불리지 못하고 '어아무개'가 되고, 사랑 받고 자라야할 어린이들은 세뇌를 통해 주입된 감정을 배운다. 사람이라기보다 로봇이 더 어울리는 세계를 보며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지켜야할 선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존엄성을 지키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배우고 책을 통해 자유롭게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읽은 기간: 2023.2.7~3.1>
1932년에 지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이 소설은 인간을 대량생산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이 대량생산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본인 등급에 맞는 일을 하고 또 성적 억제 없이 원하는 타인과 모두 성관계를 하며 가족이 없는 삶을 산다. 언뜻 들으면 불행할 것 같지만 이 신세계는 소마라는 마약을 먹고 너무나 행복하고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그런데 별 탈 없이 돌아가는 세계에서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온 사람인 ‘존’이 나타나면서 사회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끝을 맺는다.
앞 문단에서 충격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이 소설의 설정을 보고 너무 놀랐다. 최근 디스토피아 소설이 많고 또 SF 소설이 많기 때문에 1932년에 지은 고전 소설이 상상한 세계관이 이렇게 촘촘하고 기괴할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계급사회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인간을 계급에 맞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고전적 조건형성 교육, 수면 시에 듣는 교육 등등 앞에 100페이지 정도가 다 설정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에 나온 소설보다 훨씬 더 소름끼친다. 아니 소설뿐 아니라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설정보다 더 자세하고 잘 구현해놓았다. 그리고 또 캐릭터 또한 상당히 현실적인데 존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하위 계급인 엡실론이 혁명을 요구했거나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고 할지라도 소설이라는 형태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엡실론들은 소마를 먹고 다시 잠잠해지고 또 깨어있는 인물인 다른 사람도 그 신세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존의 마지막 결말 또한 너무 현실적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듯 작가가 소설 속 인물까지 현실적으로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인간이 한 사회의 기계처럼 살아가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계를 경고하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인간성 하니까 떠오르는 책이 하나 더 있다. 비록 같은 소설은 아니지만 프리모 레비 저인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자전 에세이인데, 여기서도 인간성은 무엇인가를 내가 결정하는 자유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결정하는 자유가 나를 인간으로 결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성을 잃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여기에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얼마나 들어있나. 매체와 언론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취향을 아는 것처럼 광고하고 유행에 뒤처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방송한다. 이런 광고 홍수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소비하는 것이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는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의 리뷰를 마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오웰의 <1984>와 함께 오늘날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84>가 군홧발로 짓밟는 전체주의를 그리고 있다면 <멋진 신세계>는 유전자 조작과 세뇌를 통해 인간 스스로 복종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멋진 신세계>의 시대적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이다. 여기서 포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회사 창립자인 바로 헨리 포드이다. 헨리 포드가 태어난 1863년을 인류의 새 기원으로 설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대량생산은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인간 역시 고도의 과학기술을 통해 공장의 자동차처럼 대량 생산된다. 하나의 난자에서 96개의 태아가 만들어진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 능력이 정해지고 수면 학습과 세뇌로 지식과 정보가 주입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과 직업이 정해진다.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처럼 출하되는 것이다.
계급은 있지만 계급투쟁은 없다. 세뇌를 통해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계급에 만족하며 산다. 델타와 엡실론이라 불리는 하위 계급은 유전자 조작으로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애초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경쟁도 없고 욕망도 없다. 더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덜 빼앗기기 위해 옆 사람을 짓밟지 않아도 된다.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기치 아래 사랑의 감정은 자유 섹스로 대체된다.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거나 사랑을 잃을까 봐 슬퍼하는 일도 없다. 아이들은 실험실에서 태어나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기에, 가족 간의 질척대는 지긋지긋한 감정 소모도 없다.
완벽한 질서 속에서 그저 눈앞의 안녕과 쾌락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촉감 영화를 통해, 자유연애를 통해, 그리고 '소마'를 통해! 삶은 언제나 주어진 것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진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혹여 슬픔과 같은 나쁜 감정에 빠지면 국가가 지급하는 '소마'라는 마약을 먹는다. 그럼 극도의 평온과 행복이 찾아온다. 이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인간은 안녕과 쾌락이라는 달콤함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흔들리는 존재이다. 소설은 인간 존엄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서슴지 않는다.
근데 재미없다. 설정은 있으나 이야기의 구조와 서사, 그리고 인물의 밀집도가 약하다. 유전자 조작과 유아-습성 훈련을 통해 자란 인물들만 등장해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캐릭터가 작가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한다. 살아 있는 캐릭터는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야만인 존마저도 셰익스피어로부터 세뇌당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아쉽다(존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수 읽은 인물로 등장한다). 이야기 말미에 '신세계'와 '야만인 보호구역'을 선택하면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양, 두 가지 선택만이 그에게 주어진 것처럼 행동한 점은 작가 스스로도 허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고전은 훌륭한 책이라는 공식 앞에서 늘 위축되곤 하는데(솔직히 고전은 대부분 지루하다), <멋진 신세계>는 김치찌개 냄비 받침으로 쓰고 싶다. '멋진 신세계'의 유일한 볼거리는 작가가 고안해 낸 미래 세계이다. 근데 그게 전부다. 작가는 스스로 창조해 낸 세계에 너무나 감탄했는지 혼자 흥분해서 이야기 자체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작가는 분명 자신이 고안해 낸 세계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은 소설로 존재할 때 의미가 있으며, 소설에 대한 코멘트는 독자에게 맡겼을 때 더 가치가 있다. 헉슬리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곧 도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1932년에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헉슬리는 '1984'가 1948년에 출판되자 오웰에게 편지를 썼다.
통치의 수단으로써는 몽둥이와 감옥보다 유아-습성 훈련과 마약성 최면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노예 생활을 좋아하도록 사람들에게 암시를 주어 유도함으로써 채찍질과 발길질로 복종을 강압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충족시키리라는 사실을 다음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상의 지도자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나는 믿어. 다시 말해서, '멋진 신세계'에서 내가 상상했던 바와 훨씬 닮은 세상의 악몽으로 '1984'의 악몽이 필연적으로 바뀌어가리라고 나는 느낀다네. 그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능률성을 높여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의 결과겠지.
물론 현대 사회는 헉슬리가 상상한 대로 자유연애 중(생식이 아닌 그저 즐기기 위한 섹스)이며, 태아가 시험관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약물에 의존하고 자본의 노예로 살고 있다. 헉슬리는 현대사회가 점점 자신의 예언대로 되어가는 과정을 주시한다. 그런데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세상은 헉슬리가 말한 대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투영되는 메시지가 여전히 통용되느냐 아니냐일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 소설이 재밌느냐, 재미없느냐이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가에 대해. 그래도 고전인 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보다 보니 <멋진 신세계>가 고전으로 남은 이유가 '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의 요소 중에는 독자도 포함되지 않던가. 헉슬리가 스스로 도취되어 창조한 세계는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이 바라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점이 논란을 만들고 새로운 해석과 수세대에 걸쳐 다양한 코멘트가 소설의 허점을 메우고 성장시켜 온 것 같다.
니체가 말했다. 삶은 괴로운 거라고. 괴로우면 '소마(소설에서 고통을 없애주는 알약)'와 같은 술이나 오락,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기대고 싶어 한다. 사랑의 감정 대신 아무 이성과 마음껏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세계. 지겨운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최면 학습만으로 가능한 세계. 바로 고통이 없는 세계, 오직 쾌락과 행복, 그리고 평안과 안정만 존재하는 세계. 우리가 수천 년부터 바라던 천국이나 이데아의 바로 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멋진 신세계>가 아니던가.
헉슬리는 이데아가 하늘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정말 그럴싸하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상에 천국이 곧 강림하리라 예언했다. <멋진 신세계>는 정말 성경의 천국과 흡사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인가. 독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이데아가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해결된 세계가 불쾌했다.
독자들은 질문한다. 인간 존엄이 사라진 초공리주의는 과연 참된 행복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선뜻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멋진 신세계>는 분명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에 나왔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안녕과 평온이다. 그게 설사 전체주의일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보수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차라리 전체주의를 그립게 만든다. 자유와 혁명이 거추장스럽고, 안정과 평안이 달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헉슬리는 분명 디스토피아를 경고하고 있지만, 나는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소설을 읽었다. 사실 세상은 모 아니면 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도 있고 걸도 있다. 신은 없지만 존재하기도 한다. 세상은 잔인하지만 윤리라는 편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고통은 목적도 없고 정당성도 없지만, 어떨 때는 인생의 달콤한 사과를 맛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은 천둥과 비바람을 내리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선물하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버나드 마르크스' 역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다. 저항 정신과 속물근성을 모두 갖고 있다. 버나드는 자유 의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그에 도취되어 <멋진 신세계>에 안착하고 싶어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유일까, 안정일까. 인간은 둘 다 갖기 위해 투쟁하는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잡기 위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소설 <멋진 신세계>의 훌륭한 설정과 괜찮은 철학적 질문은 우리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인간의 욕망과 쾌락, 그리고 사회 질서가 고도로 안정된 사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는 러시아 문학과 비교해 너무나 쉽게 잘 읽힌다. 이런 점들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다. 두 번 읽고 싶지는 않다.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 한정효 역] 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소설로 유명한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4와 비교하면 약간 지루한 느낌이 들게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습이 오늘날과 비교하여 정확히 예측한 부분도 있고 다소 황당한 예측도 있기도 합니다. 전반부는 약간 지루하고 후반부가 좀 더 읽을 만 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미래 문명사회의 위험성과 비판을 담고 있는 책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활은 편리해져가고, 인류는 마치 신의 위치에 선 것 마냥 오만에 빠져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인류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며 주변 환경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인류로 변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