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굴곡지고 험난했던 삶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도데체 이 사람의 인생은 왜이리 험난한가 싶었다. 일부러 소설이라 이렇게 썼을 거라 싶을 만큼 기구하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한 농부가 되고 아무 이유없이 군대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오기도 했던 사람.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얻었지만 두 아이들을 먼저 하늘 나라로 보냈고 부인도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딸아이가 낳은 유일한 손자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사위도 사고로 죽고 푸구이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늙은 소 한마리만 남아 같이 밭을 갈고 있다. 참 기구한 인생이지만 노인은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개인과 운명의 우정이라고 이야기 한다. 서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증오하는 사이라고 한다. 우리 삶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견뎌내고 살아내야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묵묵히 주어진데로 상황이 변하는 데로 그렇게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의 변화는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작가의 말에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 걸로 남겨두고 싶다. 견뎌내야하는 인생에는 동의하지만 그저 가만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견디고 싶다.
중국 작가 위화의 장편 소설이다. 원제는 活着, '살아간다는 것'이란 뜻이라고 한다.
중국 소설은 류츠신의 삼체와 루쉰의 아큐정전 정도만 접해 보았다. '위화'라는 작가의 '인생'은 어느 책에서인가 작가 추천이 있어 적어 놓았었다. 이번에 '원청'이라는 그의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미뤄두었던 '인생'을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원청'을 읽기 위한 워밍업이나 예습 차원이랄까.
이 소설은 무명의 화자인 어느 민요수집가의 이야기로 첫 문장이 시작된다.
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 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인생
그는 어느 시골에서 늙은소 푸구이를 데리고 농사를 짓고 있는 노인 푸구이를 만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인생을 살아 온 이야기를 듣는다.
대지주의 집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푸구이의 인생은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총 집합체였다. 그의 살아가는 과정은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도박, 재산을 탕진하고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과정, 국민당 군대로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여정, 아내 자전과의 재회, 평샤의 결혼, 아들 칭유와 딸 펑샤의 죽음, 아내의 죽음, 그리고 다시 사위와 손자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근대화부터 공산화까지의 시대를 아우른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인민공사에 의한 토지와 재산의 국유화, 지주계급의 몰락,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기근, 문화대혁명의 홍위군 등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아들 유칭의 죽음 이야기와 딸 펑샤의 죽음 이야기를 읽을 때는 슬퍼서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소설의 엔딩은 노인의 투박한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그의 긴 인생이야기를 함축한 듯한 단 세줄의 노랫소리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인생
위화의 소설은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의 신작 소설인 '원청'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대된다.
위화의 대표작 『인생』을 이제야 읽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처음 읽었고 이후에는 산문집을 주로 읽었다. 책은 작년에 미리 사두었다. 자고로 책은 사두고 잊어버리는 맛이 있다. 성공에 필요한 건 운이라고 밝힌 위화는 어느 날 시골 슈퍼에 갔다가 자신의 책 『인생』이 꽂혀 있는 걸 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생』 덕분에 위화의 인생은 다르게 펼쳐진다. 『인생』은 위화가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책을 읽고 영화도 봤는데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결말로 끝난다. 소설 안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부분을 걸러 내었다. 관객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 같기도 하다.
촌에서 민요를 수집하는 '나'는 소를 데리고 밭을 가는 노인 '푸구이'를 만난다. 그가 소를 부르는 여러 이름에 호기심을 느껴 대화를 시작한다. 『인생』은 대지주의 아들 푸구이의 인생 전체를 들려준다. 푸구이 자신이 직접 말해주는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눈물과 한숨,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까지 우리를 다양한 감정의 바다로 데리고 간다. 도박에 빠져 집안의 가산을 날린 푸구이는 직접 농사를 짓고 일을 하는 노동자로 살아간다. 체념과 좌절, 절망에 빠질 만도 한데 그의 곁에는 착한 사람들이 있어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서문에서 위화가 밝혔듯이 『인생』은 개인과 운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의 현대사를 끄집어 내지 않아도 인간 푸구이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아닌 한 인간의 일대기를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가진 공감 능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푸구이의 역경, 고난, 고독을 들어주는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집과 땅을 잃은 푸구이는 겨우 땅을 얻어 농사를 짓는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데리고 갔다가 엉겁결에 전쟁에 휩쓸린다. 그곳에서도 푸구이는 살아남는다.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임을 깨닫는다. 가난 때문에 그의 딸 펑샤를 남의 집에 보내고 눈물을 흘리고 아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보통의 아빠로 살아간다. 딸이 울면서 집에 남기를 원하자 그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아들 유칭이 현장 부인의 수혈을 위해 어이없이 죽었을 때에는 내가 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 인간의 삶에 드리운 비극에는 그처럼 어이없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항시 현재의 삶에는 과거에 했던 일의 후회가 따른다. 푸구이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의 후회.
여러 이름을 가진 늙은 소만이 푸구이의 현재에 남아 있다. 『인생』은 우리의 삶이란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것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닭들이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는 자라서 양이 되고, 양은 또 소가 된단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부자가 되는 거지.' 푸구이는 그의 손자 쿠건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지켜보고 그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추억과 회한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주는 것. 소설 『인생』의 결말은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
왜 동화의 결말이 해피 엔딩으로만 끝나는 것인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어린이들이 삶에 희망과 긍정을 가질 수 있는 배려인 것이다. 어차피 자라면서 알게 될 것이니까. 삶에는 마냥 좋은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영화 『인생』의 마지막은 새로운 푸구이 세대를 지켜볼 수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소설 『인생』은……. 『인생』을 읽으며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해 보았다. 역경을 헤쳐왔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어려움이 있었다면 피하지 않으려 했었다는 정도이다. 숲속의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으며 해가 지는 풍경을 좋아하는 인생이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