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요한 저
김동식 저
노혜경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는 러시아의 문학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톨스토이의 중단편집이다.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묘사가 잘 나타나있고, 광인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있다.
인생을 바꾸는 책을 많이 쓴 톨스토이 답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잘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힘든 이 시국에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 좋았다.
리틀도서관 매주한권 휴먼터치 https://youtu.be/77qPHzPRX2I
이번 책은 ‘가족 곁에서 임종하기의 빛과 그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했습니다. 책은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거장 똘스또이의 유명한 중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요즘은 거의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주류이지만 저자 똘스또이가 살았을 당시는 집에서 임종하는 것이 평범한 죽음이었나 봅니다. 저자가 밝힌 책의 주제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죽음에 대한 묘사’이니 말입니다.
이반이란 이름은 러시아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하니 이반의 죽음은 곧 평범한 우리들의 죽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똘스또이는 그런 평범한 죽음을 거부했습니다.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가족 몰래 가출을 감행하여 집 밖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똘스또이는 왜 가족 곁을 떠나서 임종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똘스또이가 예비했던 자신의 죽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꿈꾸었던 죽음과 현실에서 마주한 죽음은 어긋났던 것일까요? 사람들 중에 자신이 간절히 소망했던 임종을 맞이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2년 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당신께서 바라시던 임종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했던 아버지는 쇠약한 어머니의 임종을 마무리 지은 후 당신은 간병인의 보살핌 속에서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마다 살아가기 바쁜 자식들에게 당신의 임종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와 당신 자신의 임종을 스스로 해결하고 마무리 짓는 것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도리, 인간의 도리라 여기셨습니다. 그렇게 품위 있는 임종을 소망하고 준비하셨지만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에는 가족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반 일리치가 등장합니다. 아픈 환자인 이반 일리치에게 건강한 가족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됩니다. 건강한 가족에게 아픈 이반 역시 폭력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 때문에 불행해지고 불쌍해졌다고 여기고 약혼한 딸은 병든 아빠 때문에 맘껏 즐길 수 없어 아빠가 미워집니다. 한편 이반 일리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책임감을 다한 사람답게 항변하듯, 군림하려고 합니다.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묘사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족의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반 일리치가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몰아 부쳤는데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아내는 자기처럼 착한사람이나 저렇게 괴팍한 사람을 20년씩 데리고 살 수 있다고 구시렁거렸다. 사실 요 근래 벌어진 다툼은 모두 이반 일리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내도 울화가 터져 험한 말로 받아쳤지만, 이반 일리치가 밥상머리에서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걸 보고는 그의 질병 탓으로 돌리고 꾹 참았다.
그는 꼭 식사를 앞두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음식 맛이 영 아니라는 둥, 아들 녀석은 왜 자세가 바르지 않느냐는 둥, 딸애의 머리는 왜 저 모양이냐는 둥 온갖 트집을 잡았고, 이 모든 것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대드는 대신 자신의 참을성을 대단한 미덕이라고 여겼다. 한편 남편의 끔찍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불쌍해져서 남편이 미워졌다.
약혼한 딸이 젊은 육신이 있는 대로 드러나게 차려입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병든 몸뚱이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딸은 싱싱한 몸뚱이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젊고 건강하고 사랑에 푹 빠져 있는 딸은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 죽음,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의 전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그녀의 뽀얀 피부, 포동포동한 몸, 깨끗한 팔과 목,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칼과 생기가 넘치며 반짝이는 눈동자에 질책의 시선을 꽂아 박았다. 그는 온몸의 힘을 다 짜내어 아내를 증오했다. 그녀와 몸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이 엄마에게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시는 거예요? 꼭 우리 때문에 아프게 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나도 아빠가 불쌍해요. 그렇지만 우리를 왜 이렇게 괴롭히시는 거죠
그들은 그의 고통을 무시하고 축소한다. 그리고 그를 비난한다. 그들은 모두 그의 고통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일상을 살고 싶어 한다. 그의 고통과 죽음이 자기들의 삶으로 침범해 들어오자 그들은 분노하고 그를 미워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라는 책은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 삶은 병을 앓기 전과 후로 나누어집니다. 40대에 건강을 잃게 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돌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반 일리치의 처지가 되면 자신의 병든 몸에 제대로 적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반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과하지 않게 여가를 누려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한평생을 스케치하도록 책의 역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줄거리를 요약해 줍니다.
이반은 유복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판사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너무나도 순탄하게 잘 살아왔지만 45세 경에 불치병에 걸린다. 불치병에 걸린 시점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일생을 반추한다. 결국 임종의 순간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저 세상으로 간다.
책의 서두는 이반 일리치의 직장 동료들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죽음은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남의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죽음은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라도 분명하게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이반 일리치 동료들과 우리들의 모습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하도록 책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동료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벌써 몇 주 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불치병이라고들 했다. 동료들이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전해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동료들의 이 기쁨은 이반 일리치가 살아생전에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느꼈던 똑같은 기쁨일 수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신세를 지기도 했던 절친한 동료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야기할 이해타산을 따져 보고 대책을 강구합니다. 추도식이 있던 날 이반 일리치의 아내는 남편의 동료를 붙들고 힘겨웠던 임종에 대해 하소연합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은 절대로 임종을 겪지 않을 사람처럼 말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료 역시 임종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 부분을 옮겨봅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흘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이건 언제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러나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어날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죽음이란 이반 일리치에게만 닥친 특별한 사건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이 진리를 우리는 회피하고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나쁘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층이 두터운 요즘 70대 노인이 자신은 절대 늙지 않은 것처럼 혹은 영영 늙지 않을 것처럼 80대 노인을 노인취급하며 핀잔주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같은 노인이면서 자신의 노화와 죽음은 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젊은이가 소설 속에 등장합니다. 이반 일리치를 간병한 하인 게라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회피하고 살건만 젊은 게라심이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참 신통합니다.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는 게라심은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소년만큼 인상 깊었습니다. 게라심의 자비심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게라심의 죽음 의식이 역지사지의 선량한 성품을 발휘하는 장면을 만나봅니다.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의 어깨에 다리를 걸쳐놓고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게라심은 조금도 힘든 내색 없이 기꺼이, 편안하고 순박하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이반 일리치를 감동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건강과 힘, 그리고 삶의 활력을 볼 때마다 이반 일리치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건강과 힘과 활력이 넘치는 게라심을 볼 때면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라심이 불쑥 친근한 어투로 “안 아프셨더라도 뭐 이 정도 못 해드리겠어요?” 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도 좋았다. 오직 게라심만이 그에게 그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게라심은 점차 쇠잔해 가는 나약한 주인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한번은 이반 일리치가 게라심에게 물러가도 된다고 하자 게라심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고생 좀 하는 것이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으며, 그 또한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게라심은 추도식 때 방문한 이반 일리치의 동료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 우리도 결국은 모두 그곳에 갈 텐데요, 뭐“
이반 일리치의 가족이나 직장 동료는 자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오로지 하인 게라심만은 장차 도래할 자신의 죽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게라심은 매일매일 살아감이 죽어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생활을 밝은 사랑으로 가득 채우며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는 게라심만큼 어진 성품을 가진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합니다. 이반 일리치를 쏘옥 빼닮은 중학생 아들입니다. 가식 없는 아들의 눈물을 본 아버지는 드디어 사흘 밤낮의 울부짖음을 끝냅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창조물을 본 순간 아버지는 변화합니다. 죽음 멀리하기에서 마침내 죽음 껴안기로 돌아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우고 불안을 녹입니다.
아버지는 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 고독을 견딜 수가 없어 절규했습니다. 고독은 증오와 원망을 낳았습니다. 분노는 독이 되어 몸의 통증을 가중시켰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 아버지에게 그래도 다가가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도 다른 가족들처럼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 처절하게 소외되어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줍니다. 그 장면을 옮겨봅니다.
이반의 고함 소리는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끔찍했던지 방이 세 칸이나 떨어진 곳에서 들어도 몸서리가 쳐졌다. 이 사흘 동안 그는 몸부림을 쳤다. 마치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이 사형 집행인의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그는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사흘째 되는 날이 저물 무렵,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중학생 아들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아버지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죽어 가던 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두 팔을 내젓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빛을 보았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중에서 바로 잡고 싶은 그것이 도대체 뭐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던 바로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창조물인 아들의 눈물을 거두어 주기 위해 기꺼이 삶을 끝내고 죽음으로 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주고 보호하기 위해 죽음에 자신을 온전히 맡깁니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마지막 희생이며 베풂입니다. 사흘 밤낮을 울부짖어도 변함없이 아버지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아들의 순전한 성품에 아버지가 화답한 것입니다. 임종의 끝자락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이렇게 선행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반 일리치를 통해 배웁니다.
남겨지는 자에 대한 애달픔은 아들에게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내도 미움을 거두고 진심으로 바라보니 가엾어집니다.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아내를 비로소 정답게 바라보는 스스로의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감동스러웠을까요? 그 장면을 옮겨봅니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다들 불쌍해,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 받지 않게 해주어야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증은? 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 간 거야? 또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 ”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그동안 가까이 있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이렇게 기쁠 수가!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하다니 그 경지에 이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부럽습니다. 역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 기쁨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저의 임종 때 ‘죽음으로 향한 자유’, 라는 이 말이 떠올려지면 좋겠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향한 도정의 끝에서 온기어린 배려를 창조해 냈습니다. 생의 맨 끝자락에서도 인간은 새로워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고 깨달아질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그렇다면 질병이 이반 일리치의 몸속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 질병을 원수 대하듯 하지 말고, 질병과 함께 하는 일상을 차분하게 만들어갔더라면 또 다른 신비를 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질병이 찾아와도, 노년이 되더라도, 죽음이 닥쳐와도 그것들을 피하려 들기보다는 끌어안아 누릴 용기가 나는 듯합니다. 예전의 나를 고집하지 말고 그것들과 함께 변화된 삶을 모색해 나갈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주문해 봅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죽음의 신비는 울부짖는 자신 곁에 다가와 메마른 손을 잡아주던 아들의 따뜻한 온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비가 이토록 단순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기억해두려고 합니다. 이번 책맛보기의 제목을 “가식없는 아들의 눈물이 창조한 아버지의 단순한 죽음‘으로 정하면서 책을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