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뒤카스 저/장자크 상페 그림/이원희 역
뒤늦게나마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쌓을 요량으로 닥치는대로 고전문학을 섭렵하다보니 결국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의 배경지식'과 '글쓴이의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를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애초에 100권을 목표로 잡았다고 해서 '관심도서'에 올려두었는데,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고 난 뒤에 뜸해지더니 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춰서고 말아서 참 아쉬웠더랬다. 다시 '시작'할 것을 의심치 않으니 더 기다리면서 '완간'을 기원해본다.
작가 분야에서는 코난 도일로 시작해서 헤세와 단테를 지나 네 번째 순서로 '피츠제럴드'를 읽게 되었다. 이 시리즈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작가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을 읽을 수 있어서 '한 편의 기행문'을 읽듯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더구나 풍부한 사진이 실려 있어서 '글'로만 남긴 기행문과는 달리 '시각적인 정보' 또한 함께 읽을 수 있기에 막연한 감상이 아닌 '사실적인 느낌'으로 작가의 삶에 다가갈 수 있어서 참 좋다. 뿐만 아니라 '사진' 곳곳에 감춰진 작가의 뒷이야기도 '저자의 세련된 글'을 통해서 접할 수 있기에 견문을 넘어 '풍부한 배경지식'까지 쌓을 수 있기에 좋았다.
그래서 <피츠제럴드>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피츠제럴드의 소설들은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언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해서 <낙원의 이편>,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등의 단편소설들까지 거의 대부분 피츠제럴드가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소설가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경우엔 좀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건 바로 거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삶은 화려했고, 늘 '사교계'에 주목받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게 바로 이 책에 담긴 '호기심'이었고, 그것이 또한 '매력적인 서술'로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인 개츠비와 작중화자인 닉은 '피츠제럴드'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또 <밤은 부드러워>에서 남자 주인공은 '피츠제럴드'였고, 여자 주인공은 그의 아내인 '젤다'가 모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소설 곳곳에서 '피츠제럴드'라는 자신을 등장시키고, 그것이 마치 유명화가들이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는 것 같은 '시그니처'처럼 느껴지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들은 모두 그가 '심장마비'로 죽고 난 뒤에야 관심을 받게 된 것들이란다. 그의 유일한 히트작은 <낙원의 이편>이라는 장편소설 하나뿐이었고, 너무나도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도 그가 죽은 지 10년 뒤에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은 '가난, 그 잡채'였다. 더구나 그의 아내 젤다가 '정신병'을 앓고 정신병원은 전전했던 탓에 '병원비'에 쪼들리는 상태였고, 그나마 '원고료'를 받으면 겨우 병원비를 충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작정 글을 써냈고, '단편소설'도 뚝딱뚝딱 써냈고, 말년엔 헐리우드 상영목적의 대본을 '각색'하는 일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엔딩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견뎌야 한다고 했다. 그랬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집'을 산 적이 없고, 대부분 월세를 전전하거나 여러 호텔에 투숙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호텔들에서 말이다. 평생 가난했다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의 '상승욕구'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고상하고 품격 있는 집안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품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돈 많은 상인가문이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가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에게 곧잘 "나 없었으면 너의 아버지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았겠니"라는 말을 떠벌릴 정도였다고 하니, 집안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뗀 단어도 '엄마'가 아닌 'UP'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호사가들은 그가 품었던 '상승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호들갑을 떨곤 한단다.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작가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의지를 불태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의 첫사랑이었던 '지네브라 킹'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난'을 들먹이며 헤어지라고 강요했기에 젊은 피츠제럴드는 '반드시' 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한편, 첫사랑에 실패한 피츠제럴드는 두 번째 사랑인 '젤다'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또 다시, 젤다의 아버지가 그의 가난을 들먹이며 '파혼'하기에 이른다. 피츠제럴드는 절치부심하여 그의 첫 장편소설인 <낙원의 이편>을 대히트시키며 '유명작가의 대열'에 끼자 젤다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는 피츠제럴드가 유명작가가 된 뒤였고, 엄청난 인세를 챙기던 때였기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을 '화려한 삶'으로 보상받으려 했는데,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고 한다. 뒤이어 쓴 책들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출판시장에서도 별로 팔리지 않자 그는 곧 쪼들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씀씀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아내인 젤다가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되니 '막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말년은 호텔이 아닌 여인숙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가 동경해마지 않던 뉴욕을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거물>이라는 작품을 쓰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소설들은 그가 죽고난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개츠비가 맞이한 비극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책이 이처럼 사랑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묘한 문장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들 한다. 이는 '원작'을 접한 이들이 말하는 공통된 주장이기도 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셀린져, <노르웨이의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유명작가들의 한결같은 이유다. 물론, 피츠제럴드라면 뭐든 까기만하던 헤밍웨이조차 '그의 문장력'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극찬의 이유로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중의적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표현했는데, '원작'을 직접 접할 수 없는 나같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아쉬운 평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뒤침(번역)'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일반독자들은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한 것'인지 그 까닭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긴, 엄청난 부를 쌓고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렇게 부를 쌓을 목적이 고작 유부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으며, 끝내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고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으니...개츠비를 '최고의 찌질남'이라고 평한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great'의 뜻은 대단하다는 긍정적인 뜻도 있지만 '너 잘났다'는 부정적인 뜻도 내포하고 있기에 개츠비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을 '원작'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비영어권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에 독자들이 느끼는 '한계'가 극명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뒤침책'이라하더라도 <위대한 개츠비>를 곰곰이 곱씹으며 읽다보면, 그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한 여인을 향한 순정을 품고 '엄청난 부'를 단단히 거머쥐며 '한 시대'를 주름잡은 시대의 풍운아, 개츠비. 그는 온 도시의 유명인사를 쥐락펴락하며 자신의 파티에 끌여들일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단 한 명을 초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품고 있다. 그 아쉬움은 바로 '데이지'다. 아름다운 여성이자 개츠비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다. 그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부를 쌓은 것도 바로 데이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다고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개츠비' 자신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자신감 아닌가? 단 한 명의 여자를 위해 온 인생을 건 남자. 그 순수성에 놀라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오직 자신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그 순진함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리고 그가 뿌려대는 엄청난 부에 다시 한 번 놀랄즈음, 교통사고 한 번에 어렵게 쌓아올린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에게까지 '철저한 외면'을 당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그의 인생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살아서는 엄청난 관심을 받던 그가 죽어서는 철저한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무리 그가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고는 하나 그의 평소의 품행을 보았을 때 '결코 그랬을리 없을거야'라고 믿어주는 친구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개츠비는 이런 푸대접을 받을 위인이 아니었다. 정작 '살인자'는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개츠비는 그 살인자까지도 품고서 홀로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그 살인자가 다름 아니라 '단 하나 뿐인 사랑, 데이지'였던 탓에 말이다.
이쯤되면, 긍정적으로돈 부정적으로든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였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이 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그냥 찌질한 남자는 아니었던 탓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개츠비의 원래 모델이 '피츠제럴드, 자기 자신'이었단다. 엄청난 부를 이루고픈 갈망과 단 하나뿐인 사랑을 되찾고 싶은 욕망을 자신의 소설속에 '투영'시키고 써낸 걸작이었단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갈망과 욕망은 살아생전에는 이루지 못하고 죽고난 뒤에야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게 되었다니, 죽어서나마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직 접하지 못한 <낙원의 이편>과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다수의 단편소설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런 것이 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가장 유명한 책인 <위대한 캐츠비>를 보고 피츠제럴드를 알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나서였다.(책도 아닌 브래드 피트가 나왔다는 영화를 보고 그를 알았다는 데서 '문학상식제로'임이 탄로나서 부끄럽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주인공 그리고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산다는 설정에 기막힌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하면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역시 <위대한 개츠비>다.
그만큼 유명한 작품이기에 이 책에서 다뤄지는 내용의 상당수 <위대한 개츠비>다.
이 책은 '전기'같이 피츠제럴드의 삶과 죽음과 그의 위대함만 다루지 않았다.
작가님이 직접 미국까지 넘어가시사!! 피츠제럴드의 삶이 베어있는 곳들을 맨땅에 헤딩하는 듯(고생하신 것 같아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따라가며 쓴 이야기다. 피츠제럴드 하면 영화 <미드나잇 파리>에 나오는 그들만의 세계 속에 '위대한' 작가, 멋진 유명 작가로만 보이는 그를 상상해 볼 수 있는데, 그건 그에 관해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자전적 소설이다. 어떻게 삶의 모든 것들이 갈아 그가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었는지 이 책 한 권이 말해준다. 피츠제럴드의 삶은 소설처럼 다채로웠으며, 그의 삶은 결국 소설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면, 피츠제럴드의 위대함보단 그의 아픔과 고뇌까지 한 인간의 삶 전반부를 훑는 듯 알게 된다. 꼭 한편의 새드엔딩 영화와도 같다.
그가 왜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삶과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녹여낼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간다. 시카고 금융 부호의 딸 지네브라 킹에게 실연을 당하고, 그와 비슷한 외모의 젤다와 결혼했다. 미국 지역과 유럽(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다니며 작가로써 삶을 살다가 결국엔 젤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피츠제럴드가 바람폈었던 여인도 지네브라 킹과 닮았다고 하는데, '한 여자'를 평생 마음에 담으며 산 그의 인생이 정말이지 그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 같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츠제럴드가 들어간 프린스턴 대학이라는 명문대 입학이 성공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안에서 겪는 계급, 재력의 차이가 그가 곧 경험하게 될 미국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문가의 자제들이 모였다는 '코티지 클럽'이 바로 상징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코티지 클럽의 도서관의 고풍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운 모습은 사진으로만 봤는데도 '우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미국내에 하버드와 예일대와 함께 1위대학으로 꼽히는 건 인정하지만, 역시나 그 안에서의 차별과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의 나라' 미국과는 거리감이 있어보인다. 피츠제럴드처럼 명문대에 입학했어도, 저 곳에 입학했다는 대단한 그 누군가도 인종, 재력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코티지클럽)만의 세계'를 생각하니 씁쓸했다.
이 책은 작가님이 간 곳들이 미국 지도에 콕콕 보기 좋게 표시되어 있다.(지난 번 '40일간의 남미일주'를 봐도 그렇고 작가님이 넣어달라고 출판사에 요구하신게 아닐까 싶어 이런 센스에 또 감동하는 독자입니다!! 출판사의 센스인가요?^^) 또, 피츠제럴드가 스쳐간 장소, 물건 등이 여러가지 사진으로 담겨있어 작가님이 피츠제럴드에 관해 느꼈을 생생함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읽은 지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 감흥을 잃어버린 게 아쉽다.
아무튼 읽기 잘했어!! 다음은 <위대한 개츠비>다!!
책으로도 읽고 2013년에 영화로 상영되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뛰어난 연기로 관람한 <위대한 개츠비> 는 1920년대 1차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성장한 미국의 경제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아메리카 드림을 꿈구는 고도성장기의 미국사회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러브스토리를 넘어 미국의 사회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고전 작품으로 작가 피츠제럴드는 클래식클라우드 열두번째 거장입니다.
재즈 시대가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미국의 꿈, 그 표면과 이면을 생생하게 비추어주는 자화상,
피츠제럴드의 삶과 문학 여정을 따라가다
“변한 것은 종이뿐이었다.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시대에 빛바래지 않았다.”
1915년 시카고 금융부호의 딸 지네브라 킹을을 사랑했지만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 청년은 높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가슴아픈 설정은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살다보면 여러 겸험이 축적되고, 그 경험들이 예상치 못한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평소의 나라면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낼 때가 있다. 작가의 전성기란 바로 이런 걸 써내는 때다. 이때 ‘신은 잠시 자신의 능력을 인간에게 빌려준다.’생계를 위해 160편의 단편을 써낸 작가, 녹색 불빛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내뻗는 개츠비처럼 완벽에 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문장이 내게 말하는 듯했다. ‘인생은 원래 이렇다, 세계는 자신의 흐름대로 흘러가니 우리는 그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우리의 속도와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자기 무덤에 찾아온 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듯, 비석에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돌아오며 생각했다. 길을 잘못 들고, 시간을 낭비하고, 진전 없어 보이더라도, 생을 살아가는 이는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어 가더라도’ 말이다…….
---p128 <02 피츠제럴드가 사랑한 도시-볼티모>중에서
문학의 길은, 아니 예술의 길은 성공해봐야 결국 태생적으로 다시 슬퍼질 운명이다. 그리고 이 중 가장 큰 슬픔은,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당대 사람 대부분의 관심 밖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가 본질적으로 관심 없는 곳을 조명하고, 그 조명을 끈질기고 줄기차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심을 받아봤자, 문학의 성공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뤄지는 작은 축제에 불과하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의 화려함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피츠제럴드는 소설 속에 개츠비의 파티를 그토록 화려하게 그려냈는지도 모르겠다. 피츠제럴드는 이 슬픈 길을 걸은 작가라 생각한다.
---<04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뉴욕> 중에서
피츠제럴드의 인생에서 돈과 성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피츠제럴드만이 아니죠. 지금 시대는 돈이 권력이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올바른가요? 물론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피츠제럴드가 꿈꿈던 사회와 21세기 미국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에는 작가의 내면에 쌓인 마음이 표출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장시리즈를 읽으면서 이렇게 가슴 아프고, 슬픈 거장은 처음이었습니다.
지네브라킹과 결혼을 했다면, 아니면 아내 젤다가 조현병 걸리지 않아 정신병동에 입원하지 않았다면 피츠제럴드는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겠죠. <위대한개츠비>의 성공도 보았을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상의 불편한 문제를 문학으로 남긴 작가는 개츠비와 한평생 원한는 것을 얻고자 투쟁하였으나, 결국 피츠제럴드의 삶은 실패한 삶일까요? . 인생은 이렇게 만약에... 만약에... 정해지지 않은 길을 모두가 걷게 됩니다.
아르테 출판사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너무 사랑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이라니... 피츠제럴드편은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고, 피츠제럴드에 빠져서 "밤은 부드러워"를 중간정도 읽다가. "아 이 사람은 정말 자전적 소설을 써내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읽기를 중단하고, 클래식 클라우드 책부터 구입하여 집어들었다.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의 작품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