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의 글을 볼 때마다 내가 느낀 거북함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다. 좀 덜 친절한 서술 방식과 많이 날카로운 질문과 더 많이 뾰족한 주제의식들.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게 이 탓이었던 것이다. 나는 SF소설이 아기자기하게 전개되는 것을 좋아하는 쪽인 모양이다.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전개해 나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그래야 흐름을 따라갈 수 있으니, 이건 내 한계).
이 작가의 글에서는 상상의 고리 사이를 바로바로 따라잡지 못하다 보니 무슨 뜻으로 펼쳐지는 상황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후다닥 글은 넘어간다. 차근차근 따지면서 곱씹기에는 무언가 쫓아오는 듯한 혹은 앞질러 가야만 덜 무서울 듯한 부담감에 그만 다음 문장으로 나서고야 만다. 그러니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결국 헐렁해져 버리고 마는 독서의 끝. 촘촘한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 서운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무섭다는 데 있다. SF소설이 장르의 특성상 특별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가가 건드리고 있는 소재나 사건이나 주제의식이나 배경들은 어느 하나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네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 있으면서 누구나 이래서 되는 것인가 싶을 그런 상황들을 무시무시한 상상과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이런 미래라면 살아 남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어둡고 섬뜩하며 뾰족뾰족 날카롭기만 한 상상 속 미래의 모습들. 하기는 지금의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행태들을 보면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는 것도 예측은 되지만. 어쨌든 공간적 배경으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의 마지막 지점인 해왕성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나 미래를 제한 없이 넘나드는 상상 속에서 나는 작품마다 번번이 두려움이라는 멀미를 겪었다. 그러니 책 읽을 맛이 날 리가 있나. 그나마 [사춘기여, 안녕]이 내 취향인 글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고.
상상이락고 해서 늘 장밋빛일 수는 없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이렇게 치밀하게 상상해 내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겠구나 싶다. 읽는 내 마음만큼은 아니었기만을 독자로서 살포시 바라는 수밖에.
총 일곱편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표제작 두 번째 유모가 제일 좋았고 다른 단편들도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있었다. 대리전은 일전에 읽은 적이 있고 나머지는 다 처음인데.. 듀나의 단편들은 한번에 쓱 이해가 되고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뭐랄까 낯선 설정과 상상력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고 SF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읽다가도 어? 뭔 말이야.. 싶은 부분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외계인 과 초 인류, 시간 여행과 기억 복제, 궤도 엘리베이터와 전지 전능한 인공 지능이 등장하는 이 단편집을 읽다 보면 다가온 미래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 우리는 점점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해 머릿속으로나마 사고 실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이너한 SF 바닥에서.. 한국의 현실과 결합한 독특한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는 듀나의 작가적 위치는 매우 독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말이 되냐?? 싶다가도 그래.. 그럴수도 있겠네.. 끄덕 끄덕하게 되는 그런 단편들이 책에 가득하다.
두 번째 유모는 미쳐버린 인공지능 아버지들에 대항해서 해왕성에 자리잡은 신 인류를 지켜내는 서린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이다. 친구 가을이 남긴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서린의 모습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이고.. 휴머니즘이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인지를 느낀다면 너무 확대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어린 생명을 지켜내는 책임감 있는 어른들이 현실에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환타지라고 분류해야 할지도.
우주로 나아가는 신 인류를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이상한 믿음을 쉽게 버릴 수 있도록 설계 하는 것이라니.. 꽤나 시니컬하고 유쾌한 펀치 라인이 아닌가 싶었다. 이상한 믿음.. 이상한 종교..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현실, 우리의 아이들은 제발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란다.
작가 - 듀나
듀나의 단편집이다. 전에 리뷰를 적은 ‘구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는데,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지구와 다른 별, 과거와 미래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어쩐지 현대를 교묘하게 풍자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리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인간 숙주에 정신을 이동시켜 지구를 여행하는 외계인들이 많아진 미래. 주인공은 그런 외계인 여행객을 안내하는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여행객이 여행사를 방문하는데, 사실 그들은 지구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구에서 노리는 것은 과연 무얼까?
처음에는 왜 제목이 대리전일까 싶었는데, 끝까지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럭비 경기, 아니 우주 전쟁! 소박한 거 같은데 은근히 스케일이 컸다. 한국은 미래에서도 다른 나라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될 운명이었단 말인가!
『사춘기여, 안녕』은 뇌시술을 통해 감정 조절이 가능해진 시대가 배경이다. 사춘기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완벽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른들의 바람대로 집중력 있고 차분하며 감정의 변화 따위는 느끼지 않는 아이가 된다. 주인공은 아빠의 반대로 유일하게 시술을 받지 않았다. 이에 소년은 아빠의 판단에 따르지 않기로 하는데…….
분노 조절이 가능함에 따라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좋아지며, 자신의 숨겨진 재능까지 파악하여 진로를 정할 수 있다니! 이건 완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시술이 가능하다면,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난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런데 나노봇을 뇌에 이식한다면, 그건 내 의지일까 나노봇의 의지일까
『미래관리부』는 어느 순간, 미래에서 온 후손들이라는 자들이 청각장애인을 통해 현재에 연락해온다. 그들은 역사를 완성하겠다며 현재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을 한다. 이후, 사람들은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상실한다. 어차피 후손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잘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과연 그들이 미래에서 온 후손들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현재의 우리가 움직인다면, 그건 현재를 사는 걸까 미래를 사는 걸까? 내가 뭔가를 이루어간다는 성취감이 사라진 사람들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가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건 뭐랄까, 미래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위한 에너지를 만드는, 마치 배터리가 된 기분이 아닐까
『수련의 아이들』은 LK 생물공학연구소에서 청소를 하는 수련의 이야기다. 우연히 연구소에서 만든 액체를 뒤집어쓰게 된 수련. 이후 그녀의 신체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LK라는 이름이 낯익다. 그렇다. ‘아직은 신이 아니야’에서 어떻게 보면 악의 축으로 등장했던 기업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온갖 이상하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다.
『평형추』에서도 LK 그룹이 등장한다. 대외업무부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우연히 ‘최강우’라는 신입사원을 눈여겨보게 된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는 죽은 회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조사하던 주인공은, 놀랄만한 비밀을 알게 되는데…….
이 시대에는 ‘웜’이라는 것을 뇌에 이식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웜을 이식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활용도는 다양하다. 문제는 최강우가 이식받은 웜에 있었다. 그걸 다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패스. 하여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부처님 손바닥 위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해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시간대로 오갈 수 있는 때가 배경이다. ‘시간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다양한 시간대를 다니며, 침략하기도 하고 문물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선이 꼬이면서 다양한 분기점을 만들어내는데…….
뭔가 복잡하다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꼬이는 것이, 역시 시간 여행은 어렵다는 느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나를 만나면, 진짜 나는 누구일까? 모든 시간대에 있는 내가 다 진짜일까?
『두 번째 유모』의 배경은 해왕성이다. ‘아버지’라 불리는 인공지능들의 전쟁이 있은 후, ‘어머니’라 불리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슷한 신인류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며 어머니와 소통하던 ‘가을 이모’가 사망한 이후, ‘서린’이라는 여인이 화성에서 도착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침략에 맞설 준비를 하는데…….
보호하고 건설하는 어머니와 파괴하고 살육을 즐기는 아버지라…….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이상한 믿음에 휩쓸리지 않고 양서류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 인간의 미래란 어떤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과연 지금의 이 겉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을 인간이라 결정짓는 건 어떤 요소일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다. 책을 읽다 몇몇 작품에 기시감이 들면 그건 그간 발표했던 작품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몇몇 익숙한 제목의 작품들을 좋아하기도 했고, 뭐, 그냥 드래곤볼 모으는 기분으로 구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역시 대리전.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시대물로 읽으라는데, 어쩐지 면세구역이나 태평양 횡단특급의 향수가 물씬 풍긴다 했다. 물론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