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델리아 오언스 저/김선형 역
이미예 저
천선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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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와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를 읽기 전에 장강명 산문집 <책, 이게 뭐라고>를 읽은 건 어떤 전조였을까? 세상을 향해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임무를 자신에게 지운 2000년대 한국의 장강명이라는 작가와 1900년대 영국의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는 시대도 다르고 태어난 나라와 환경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엔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생각을 품었었기에 사회를 비판하고 전체주의의 종말을 묘사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에세이였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립예비학교에 들어 갔지만 그곳에서 상류층 아이들과의 차별을 겪으며 우울한 시절을 보냈고, 19살의 나이에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미얀마에서 대영제국의 경찰로 5년간 근무했지만 영국제국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뿐이었다.
삶이란 본디 층층이 위계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옳은 일이었다. 강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이길 자격이 있었고, 그래서 늘 이겼다. 또 약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져도 쌌고, 그래서 늘, 끊임없이 지기만 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17p
어린 나이에 자신의 위치가 정해져버린 오웰에게 진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혹은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늘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오웰은 자신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믿었다.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불쾌한 사람에게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자신에게도 냄새가 나겠거니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그를 상당히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서른 살 무렵까지도 늘 나는 큰일을 도모해봤자 망할 게 뻔하고, 앞으로 몇년이나 더 살지 모른다는 가정 하에 앞날을 계획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24p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
나는 그런 경우 약자에게 자신을 위한 새로운 법칙을 만들 권리가 주어진다는 거을 알지 못했다. 설사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그것을 사실로 확인해줄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30p
1911년에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간 조지 오웰의 학교 생활이 기술된 부분을 보면서 벌써 10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일처럼 보인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있는 아이들은 선생들로부터 특혜를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수입을 묻고, 차종을 묻고, 집의 크기를 묻는다. 더 좋은 학교에 진급시키기 위해서 상류층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인가, 아니면 아직도 인간이라는 종이 여전히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오웰은 자신이 8살 어린 나이에 상류층의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었을지언정 관리의 아들이었으니 일반 학교에 다녔다면 특별히 모자라게 자라지는 않았을 테고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겪어야 했던 패배감으로 자존감이 낮아지지도 않았을터다. 그곳에서 느꼈던 분노와 증오, 그리고 패배감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까지 얼마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엇이든 쉽게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남들의 농간으로 열등감에 쉽게 빠지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에 쉽게 물든다.
<코끼리를 쏘다> 中 152p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거나 글 쓰기를 좋아했던 소년 오웰은 결국 작가로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말하는 산문을 쓰는 동기는 네가지이다. 똑똑해보이고 싶고, 세간에 회자되고 싶고, 사후에도 기억되고 싶은 더없는 자기중심주의가 그 첫번째이다. 두번째는 미학적 열정, 세번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상을 발굴해서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내 글쓰기의 시작점은 늘 당파 의식, 불의에 대한 공분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쓸 때 나 자신에게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목해주길 바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이다.
<코끼리를 쏘다> 中 202p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은 상당히 날카롭고 지적이어서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 표시를 하다보니 한장 걸러 한장씩 표시를 하게 될 지경이었다. 산문집의 표제로 쓰인 <코끼리를 쏘다>는 한편의 긴장감 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식민통치를 하는 영국인들을 은근하면서도 대놓고 미워하는 버마인들. 백인의 동양지배라는 상황을 코끼리 사건을 통해 통렬히 비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더이상 아무런 해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코끼리를 쏴야만 했을 때의 오웰의 심정은 그야말로 절박해보였다.
벡인 통치의 전제조건이 늘 이른바 '원주민'에게 감명을 주는 것이고, 따라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게 변한다.(중략) 내가 그때 코끼리를 쏜 건 그저 바보처럼 보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이 있을까.
<코끼리를 쏘다> 中 183p
이 외에도 오웰이 책방에서 일하던 시절에 느꼈던 일들과 평론가로의 삶을 살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단편으로 담겨져 있는데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글쓰기에 대한 의무감과 애정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자라온 환경과 지난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두고 보니 그의 작품이 훨씬 더 잘 이해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이 엉망진창이라고, 너무나 많이 망가져서 말세라고들 하는데 오웰이 살았던 시절은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있었고 온갖 사상들이 급작스럽게 나타나 사람이 사람을 파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펼치고 세상을 고발하는데 온힘을 다하려 했던 오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산문집<코끼리를 쏘다>는<코끼리를 쏘다>를 비롯해 모두 일곱 편의 산문이 실려있습니다. 오웰이 버마에서 인도 제국 경찰로 근무한 시기는 19세부터 24세까지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쓴 산문은<코끼리를 쏘다>이고 소설로는 <버마 시절>이 있습니다. <코끼리를 쏘다>는 코끼리를 쏜 이색적인 경험 자체가 포커스가 아니라 그가 왜 쏘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코끼리가 난동을 부렸지만, 나중에는 진정된 상태였습니다. 즉 안전상 쏜 게 아니라 버마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는 상황이고 수천 개의 눈은 오웰이 코끼리를 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끼리 쏘지 않으면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지고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얕잡아 보기 때문에 쐈다고 오웰은 말합니다. 책의 한 부분 "백인이 폭군이 되면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라는 사실을" 이 부분이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해할수록 가해자도 피폐해진다는 걸 가르쳐주는 문장입니다. 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로 그만둔 후 유럽에 온 그는 다시는 코끼리를 쏠 필요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즐겁던 시절>은 산문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산문입니다. 오웰이 예비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입니다. 학교에서 오웰이 당한 부당한 대우는 그 당시 영국의 사회상(빈부격차와 황금 만능주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위대한 작가도 현실적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자양분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그때의 경험이 오웰에게 긍정적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세인트 시프리언스에 다니면서 느낀 자괴감과 소외감은 오랫동안 그를 짓누르며 그의 의식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왜 쓰는가> 오웰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고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조차도 20대 초반까지는 직업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결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국은 계속 글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하게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입니다. 오웰은 글을 쓰며 (특히 에세이)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고 상처를 치유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가 외부적으로는 불합리한 정치 체계나 독재자처럼 인류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진보를 침해하는 것을 고발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산문처럼 왜 자신이 쓰는지 끊임없이 번민하고 사유했기에 오웰이 명작을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방의 추억>은 오웰이 북러버스 코너에서 6~8년 일한 경험을 토대로 쓴 글입니다. 실제로 책방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입니다. 산문집에서 가장 여성적인 성격을 지닌 글입니다.
<어느 서평가의 고백>의 첫 문장 "서평가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하수구에 버리는 셈이다."라는 문장은 오웰의 통찰력이 빛나는 문장입니다. 실제 서평가가 읽어보면 격하게 공감할 글인 것 같습니다. 서평가의 삶을 사실적 그린 글입니다.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는 우리는 사회주의자라면 우선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는 악의 화신일까요?
그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나 반추해봅시다. 안정된 직업인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둡니다. 이유는 식민지 버마인들에 대한 죄책감과 영국의 제국주의에 부끄러움을 느껴서입니다. 그 후에 유럽으로 돌아와서 도시 부랑자들의 삶을 관심을 둡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과 씁니다. 30대에는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목에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동물농장은 어떠한가요?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집필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소련과 우호적 관계였기 때문에 출판업자들은 출판을 꺼립니다. 이런 정치적 이해관계를 오웰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사회주의자였지만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는데 온전히 동의 할 수 있습니다. 산문에서도 여러 가지 문학을 예로 들어 사회주의자가 꿈꾸는 목표인 인류애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산문 <영국적 살인의 쇠퇴>는 칼럼리스트로서의 오웰의 모습이 산문집에서 가장 잘 드러난 글입니다. 20세기 영국의 살인 사건들을 오웰이 분석하고 논평한 글입니다. 살인 사건의 공통된 특성과 대표적 살인마를 언급합니다. 그 가운데 턱 보조개 살인 사건의 경우 살인마저도 영국식은 쇠퇴하고 미국식으로 범죄 유형이 바뀌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조지오웰은 우리에게 [동물농장]이나 [1984]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를 최고의 작가로 만든 이런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도 오웰은 많은 글을 썼다. 한때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던 오웰의 글은 소설보다 산문에서 더 재능을 발휘했다고도 한다. 그런 그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면서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막상 오웰의 삶과 사유를 담고 있는 산문은 읽어보지 못한지라, 기대를 안고 이 책을 읽었다.
이 책 [코끼리를 쏘다]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7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이르게는 1936년부터 늦게는 1952년에 발표된 글들이다. 오웰이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50년이니 1952년에 발표된 글은 그의 사후에 실린 글이 아닐까 싶다.
오웰이 살았던 시대는 전쟁으로 평화가 무너지는 시기였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을 보면서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에 대해 극도로 혐오감을 갖게 된다. 또한 어린 시절 상류층 아이들과 심한 차별을 맛보았고, 장학생으로 들어간 이튼스쿨에서도 계급 차이를 실감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에서 ‘글의 주제는 작가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특정한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124쪽)고 말한다. 결국 오웰이 살았던 시대와 성장배경이 그로 하여금 계급의식 등 당시의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쓰게 했지 싶다. 그는 산문을 쓰는 동기는 허영심과 같은 자기중심주의,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미학적 열정, 현재의 일을 기록한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이라는 네 가지가 있지만, 자신이 글을 쓰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내가 무기력한 책을 쓰고, 미사여구와 의미 없는 문장과 장식적 형용사와 객소리에 빠졌을 때는 예외 없이 내게 정치적 목적이 결여됐던 때’(134쪽)였다며, ‘예술은 정치와 완전히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정치적인 태도’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글쓰기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고 오웰이 맹목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인류애’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처절한 정치 투쟁에 삶을 바치고, 내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게슈타포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것은, 중앙난방과 냉방장치와 형광등이 있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류가 서로를 착취하고 죽이는 대신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을 원해서다’(168쪽)라는 그의 글은, 오늘날 좌나 우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코로나 팬데믹 쇼크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과연 인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너무나 즐겁던 시절>은 장문의 산문으로, 오웰이 어렸을 때 다닌 예비학교 세인트 시프리언스 시절을 회고하는 글이다. 8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예비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상류층 아이들과 학교의 교장부부에게 심한 차별을 당한다. 명문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될 가능성이 있어 학교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로 학비감면을 받았기에 입학이 가능했던 오웰이지만, 교장부부에게는 그저 자신들이 선심을 베푸는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쓸 때에는 늘 과장과 자기연민을 경계해야 한다’(47쪽)고 말하는 오웰은, 세인트 시프리언스 시절의 회고를 통해 신분 차이에 따른 차별, 입시에 필요한 것만을 외우고 머리에 집어넣도록 닦달하며 체벌도 서슴치 않는 교육환경 등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쓰고 있다. 산문의 제목인 <너무나 즐겁던 시절>은 역설적 표현이다.
이밖에도 책에는 오웰이 제국주의 모순과 한계를 느낀 미얀마에서 영국의 경찰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인 <코끼리를 쏘다>, 헌책방에서 근무할 때 그곳에 드나들던 사람들에 대해 쓴 <책방의 추억>, 상업적 서평을 쓰는 서평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어느 서평가의 고백> 등이 실려있다.
오웰의 산문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오웰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오웰을 작가로써, 저널리스트로써 단지 그가 발표한 글을 보고서 평가할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한다고 했지 싶다. 작품에 쓰여 있는 글만을 읽은 것과 작가가 살아온 시대와 성장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읽은 것은 작품의 이해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오웰의 글들을 적지 않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서 또 다른 그의 글들, 특히 그가 초기에 썼던 작품들을 더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내가 읽어야 할 작가가 또 한 명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