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후유증이 촉발한 과거의 기억, 상처 입은 어린아이와의 대면남편과 여덟 살 딸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에서 순조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나’는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대형 사고였지만 사고 현장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올 수 있었을 만큼 부상은 가벼웠다. 외상이 없으니 회복도 신속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몸이 나아지지 않자 ‘나’는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에 부딪힌다. ‘나’는 자신을 한계에 몰아넣은 것이 자신의 취약 부분, 바로 부모와의 관계임을 더딘 회복 과정에서 깨닫는다. 중년에 접어든 ‘나’와 남편은 각자의 고국을 떠나온 지 스무 해가 넘었으며 이들의 나고 자란 가족은 모두 고국에 있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나’는 성인이 된 후 부모와 물리적 거리를 두며 살아 왔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인해 체력과 정신력이 밑바닥에 떨어지자 위로받지 못한 어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아직도 질기게 연결된 부모와의 정서적 거리를 경험한다. 교통사고가 ‘나’ 자신을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한 동시에 의식적으로 지워온 겁에 질린 어린아이를 만나게 해준 셈이다. ‘나’의 회복은 이 아이와의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를 이해하는 것에 온 힘을 써왔다. 아프다는 소리를 누구에게도 안 했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참고 이해하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고 자신이 자라는 방식이었다. 폭력 가해자였던 아빠는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나’의 원 가족 삶 속에 있고, 엄마는 죽은 아빠를 거듭 끄집어내며 자신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나’는 폭력 피해자인 엄마는 마땅히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었지만, 자신이 밑바닥에 있을 때도 당신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퍼붓는 엄마를 보며 지금껏 믿어왔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딸과 엄마, 말하지 못하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1부와 2부로 나뉘어 13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화자의 회복 과정을 따라가며 그 내적, 외적 변화를 치밀하게 그린다. “엉덩이 밑에서 등 중간까지 굵은 바늘을 꽂아 넣는 것 같은” 선명하고 날카로운 최초의 통증 이후, 발작 기침과 앞가슴뼈 통증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끔찍한 시간을 지나기까지 ‘나’는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숱한 감정의 격랑을 경험한다. 이때 현재의 가족인 남편과 딸은 ‘나’의 고통을 진정시켜주고 ‘나’를 일어나게 하는 힘이라면, 원 가족인 엄마 아빠는 신체적 질환 속에서 더 생생히 떠오르는 상처의 근원지다, 특히 엄마는 현재 시점에서 화자가 정서적, 감정적으로 가장 두려워하고 힘겨워하는 존재다. 소설은 서사의 상당 부분을 화자가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 엄마와의 관계에 할애한다. 그것은 엄마가 화자에게 보낸 문자메시지가 소설을 열고 닫는 구실을 하는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빠는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나’로서는 원망도 미움도 떠나보내고 “잘 다듬어진 이해와 치밀하게 얽힌 감사”만을 느끼는 데 반해 엄마는 여전히 ‘나’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침입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고국에서 혼자된 엄마는 더욱 가련한 모양새로 죽은 아버지 뒤에 숨어서 책임은 회피하고 권리만을 챙기려 든다.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엄마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늘 ‘말하지 못하는 자’이고 엄마는 늘 ‘듣지 못하는 자’다. 소통이 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는 자주 실망과 염증을 낳고 지친 마음은 자발적 후퇴에서 관계의 철수까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는 막힌 숨구멍을 틔우기 위해 엄마에 대한 미련을 보내는 듯싶다가 난데없이 도착한 엄마의 메시지로 인해 보낸 미련을 다시 주워 담는다. 엄마는 그렇게 ‘나’의 곁에 끈질기게 존재한다.전쟁터에서 낙원으로, 위험 속에서도 가족은 진화한다화자가 성인이 되어 캐나다에서 이룬 가족은 이상적이라 할 만큼 완벽하고 조화롭다. 부부는 애정과 신뢰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고 아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유롭게 자란다. 그린벨트로 보호받는 숲과 강을 지척에 둔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든 똘똘 뭉쳐 있으며, 다정하고 예의 바른 이웃은 누구도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화자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의 가족이 전쟁터였다면 캐나다에서 이룬 가족은 낙원이라 불릴 법하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낙원’을 지키고 어떠한 위험도 자신들의 울타리를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미 현실은 가까이에서 위험이 닥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딸 로야와 같은 수영 클럽에 디니던 중학생이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들이 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총기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이 겪은 교통사고 역시 가족 모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위험에 대한 화자의 불안과 강박은 아이 손을 놓치고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딸아이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사고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자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죽음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남편의 고국 이란에서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한결같이 진중하고 확고하던 남편이 흔들린다. 남편 역시 ‘나’처럼 나고 자란 가족 내에서 권리는 없고 책임만 떠안으며 살아왔지만 ‘나’와는 달리 부모와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가 응어리로 남지는 않았다. 그런 남편마저 부친의 죽음으로 나약한 상태에 빠진다. 소설에는 여러 형태의 죽음이 등장한다. 현재의 죽음과 과거의 죽음이 있고, 어린 죽음과 나이 든 죽음이 있다. 가깝든 멀든 죽음은 무언가를 남긴다. 어떤 죽음은 좋은 것만을 유산으로 남기고 어떤 죽음은 훗날 ‘나’를 찾아와 위로를 보내기도 한다. 시간 속에서 죽음은 삶에 깃들고 삶은 이어진다.쇼스타코비치, 말러, 차이콥스키: 음악이 주는 카타르시스『로야』에는 고전음악과 관련된 인상적인 장면이 몇 차례 나온다. 화자의 가족은 음악 애호가로 주말마다 음악회를 찾는데, 음악은 가족을 결속하면서 ‘나’의 삶에 드리운 고통과 죽음과 불화를 감싸고 폭발시키고 해방시킨다. 사고 후 처음 찾은 음악회에서 들은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 현악 사중주는 ‘나’로 하여금 “불편함과 불안함과 무서움을 지나 우울과 슬픔에” 다다랐다가 “여러 껍질이 벗겨져서 한결 가벼워진 느낌으로 부유하게” 한다. 시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말러의 부활 교향곡은 고인을 모셔 와 눈물과 미소로 지난 삶을 축하하는 의식이 된다.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을 들을 때는 “환희의 축포”인 듯 “절망의 폭격”인 듯 쏟아지는 대포알 소리가 ‘나’의 부모와 겹쳐지며 가슴을 내려치는데, 엄마와 ‘나’는 같은 곡에 다른 의미로 숨이 멎는다. 작가의 음악적 소양이 서사에 녹아들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여성 서사의 눈부신 성취, 가장 내밀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로야』는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집요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다. 여성이 자신의 내면을 이토록 정교하게 탐구하고 해석하는 것은 여성 서사의 눈부신 성취다. 화자의 강박은 오랫동안 숨기고 감추어온 것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을 드러내 보이고 ‘아프다’고 말함으로써 회복은 시작된다. 이는 작가의 쓰는 행위와 연결된다. 다이앤 리는 자신이 그대로 투영된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왜 쓰는가? 나의 상처는 무엇인가? 그토록 상처 입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답한다. “오래된 질문이자 모든 작가의 출발점이다.”(심사위원 김별아) 그리고 이야기는 여전히 열려 있고 진행 중이다. 작가는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가장 협소하고 내밀한 부분은 시공간을 초월해 유사하다. 가장 협소한 곳에 가족이 있고 가장 내밀한 곳에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로야』는 한국문학의 가장 먼 곳에서 온 가장 가까운 이야기, 가장 내밀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