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에게 열려 있는 시간
나도티는 존 버거의 책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의 중심사상이 바로 ‘시간’임을 다시 확인했다고 한다. 역사와 정치의 흥망성쇠에 따라 변화하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시간, 즉 기억과 애도의 시간, 사랑과 희망의 시간, 생물학적 몸의 시간과 영원한 의식의 시간, 저항과 반역의 시간, 계획과 꿈의 시간, 덧없는 나비의 생과 산맥과 빙하 사이에 있는 자연의 시간,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자본의 시간, 꿈과 창작, 글쓰기와 그리기의 시간 등, 그의 글에서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주제다.
셀축 데미렐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존재 자체이기도 한 지속되는 생성의 돌연변이와 변태와 반전이 이야기된다. 존 버거는 생전에 그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창의적인 작업을 이어나가는 셀축은 때때로 인간 몸의 부위들을 삽화 소재로 삼되, 냉정하면서도 터키인 특유의 시각, 즉 프로테스탄트 문화의 영향에서도 지중해 문화의 영향에서도 자유로운 시각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해 나아가고 있다. 마치 인간에게 조건지어진 삶의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그의 몸이고, 그의 몸에 대한 우울한 해부에서 그 희극이 확인되기라도 하듯.” 이처럼 데미렐의 그림 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시간의 한계나 공간의 경계 없이 뒤섞이고 잘려나가고 재탄생한다. 존 버거에게도 존재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자연과 사물, 예술작품과 일상의 물건, 고양이, 나무, 숟가락과 시계, 사상과 행위가 존재하고, 그들의 존재는 영구히 움직이고 변화하고 서로 부딪치고 절대 고정되지 않는다.
시간에 관한 철학적 명상
책은 존 버거의 글이 아닌 예브게니 비노쿠로프(Yevgeny Vinokurov)의 시로 시작한다. “이따금, 책을 쓰고 싶어진다 / 오롯이 시간에 관한 책을 / 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지, / 왜 과거와 미래가 / 끊임없는 하나의 현재인지에 관한 책을. /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은, / 살았던 사람은 / 그리고 앞으로 살 사람은, 지금을 살고 있다. / 소총을 분해하는 군인처럼 / 나는 이 주제를 샅샅이 해체하고 싶다.” 이는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에서 존 버거가 인용했던 시를 재인용한 것인데, 근대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 문명과 도시화에 의해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인간 소외의 문제에 매달렸던 그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가 시간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는지, 그렇게 교환된 시간이 어떻게 ‘죽은’ 시간이 되는지 비판하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시간이 자기에게 결여된 내용과 교환된다. 노동시간이 임금과 교환되고, 임금이 상품에 갇힌 ‘살지 않은 시간’과 교환된다.”(38쪽) 그리고 늘 그렇듯이 거기에 저항할 힘을 바로 사랑에서 찾는다. “이에 대비되는, 또 이에 도전하는, ‘단 하나의 공시적 행위’는 사랑의 행위다.”(33쪽) 글쓰기와 그리기의 시간도 다루는데, 이는 그의 글과 그림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구절과 함께 흐르는 독특한 책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인용된다.
“서사는 순간이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이 멈추기 때문이다.”(12쪽)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시간 감각을 잃는다.”(108쪽) 서사의 방향이 직선적이지 않고, 그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며, 순간과 영원이 함께 존재하는 그의 작품들을 연상하게 하는 문장이다. 이를 포함해 ‘시간’을 둘러싼 오십여 개의 글귀들이 데미렐의 위트 넘치는 그림 육십여 점과 함께 흐른다. 소설, 시, 에세이, 비평문 등 원문의 형식은 다양하지만 이 책 안에서의 흐름에 맞게 하나의 문체로 번역했고, 수록문 출처를 책 끝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