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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마이클 린치 저/성원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7월 23일 리뷰 총점 9.5 (13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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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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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가짜 뉴스가 단순히 내 맘에 들지 않는 뉴스가 되어버린 시대,
독단의 확산과 오만의 정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영어에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노잇올(know-it-all)’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책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명절 때마다 정치 이야기에 핏대 올리는 술 취한 삼촌이나 커피 마시는 것 하나까지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피곤한 친구에 관한 일화를 넘어서 우리의 정치적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더 나아가 문제의 핵심이 자리하게 된 ‘노잇올’, 즉 도덕적이고 지적인 오만함의 문제를 탐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거대한 심연을 느낀다. 둘 사이에 공통분모는 갈수록 적어지고 심지어 가장 하찮은 사안마저 논쟁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가짜 뉴스’는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 뉴스를 일컫는 표현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후변화와 백신, 그리고 선거 결과 같은 ‘사실’의 문제까지 흔들리고 있다. 저자는 탈진실의 시대에 인간의 조건이 되어버린 오만함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숙이 탐사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확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경멸과 우월감으로 무장한 채 파벌주의의 덫에 빠져버린 민주주의에 확실한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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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가짜 뉴스의 시대, 믿음과 확신에 던지는 질문
1장 몽테뉴의 경고
인간보다 더 형편없는 존재는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을 감성으로 더럽힌다
오만한 사람들의 치명적인 사회성
2장 분노 공장
구글은 다 안다
호두 껍질 밑에 동전이 있을까?
확신을 양성하는 신병 훈련소
3장 삽이 휘는 곳
마음 깊은 곳의 기반암
확신은 자아상을 반영한다
믿음은 어떻게 확신이 되는가
4장 오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
진실에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
트럼프는 있는 그대로 말한다
백인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
오만함과 무지 그리고 경멸
5장 자유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오만한 자유주의자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오해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보다 똑똑한가?
경멸의 정치학
6장 민주주의와 확신의 문제
소크라테스의 교훈
오만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철인왕과 이성의 공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
감사의 말
주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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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명)

저 : 마이클 린치 (Michael Patrick Lynch)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소장, 뉴잉글랜드 인문 컨소시엄 소장을 맡고 있다. 인식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다원주의 진리론’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꾸준히 발표하여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우수연구메달을 받았으며, 미국 국립 인문학 재단, 템플턴 재단 등에서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적인: 왜 진리가 중요한가True to Life》 《맥락 속의 진리Truth in Context》 《이성 예찬In Praise of Reason》 《인간 인터넷Internet of US》 등...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소장, 뉴잉글랜드 인문 컨소시엄 소장을 맡고 있다. 인식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다원주의 진리론’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꾸준히 발표하여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우수연구메달을 받았으며, 미국 국립 인문학 재단, 템플턴 재단 등에서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적인: 왜 진리가 중요한가True to Life》 《맥락 속의 진리Truth in Context》 《이성 예찬In Praise of Reason》 《인간 인터넷Internet of US》 등 많은 저서가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인간 이성과 합리성의 실용적 가치와 철학적 의미를 재조명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중에서 《사실적인》은 <뉴욕타임스> 선데이 북 리뷰에서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05년 철학 분야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편집자의 선택’에 선정되었다. 또한 《맥락 속의 진리》는 철학 분야의 우수 저작물에 수여하는 초이스 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빅데이터 시대에 민주주의와 공공 담론에 필요한 진리에 대한 태도, 기술의 윤리 문제에 천착하며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다. 책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게 좋아서 시작한 번역이 어느덧 업이 되었다. 책을 통 한 사색만큼 물질성 있는 노동을 사랑한다. 슬하에 2묘를 두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성, 인종, 계급』 『빈 일기』 『인류, 이주, 생존』 『디어 마이 네임』 『백래시』 『기후 카지노』 『쫓겨난 사람들』 『캘리번과 마녀』 등이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다. 책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게 좋아서 시작한 번역이 어느덧 업이 되었다. 책을 통 한 사색만큼 물질성 있는 노동을 사랑한다. 슬하에 2묘를 두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성, 인종, 계급』 『빈 일기』 『인류, 이주, 생존』 『디어 마이 네임』 『백래시』 『기후 카지노』 『쫓겨난 사람들』 『캘리번과 마녀』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무엇이 ‘사실’의 문제를
‘확신’의 문제로 바꿔버리는가?
현대 정치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만의 문제를 탐사하다
영어에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노잇올(know-it-all)’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주변의 한두 사람쯤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책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명절 때마다 정치 이야기에 핏대 올리는 술 취한 삼촌이나 커피 마시는 것 하나까지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피곤한 친구에 관한 일화를 넘어서 우리의 정치적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더 나아가 문제의 핵심이 자리하게 된 ‘노잇올’, 즉 도덕적이고 지적인 오만함의 문제를 탐사한다.
정치가 좌파와 우파 사이의, 여당과 야당 사이의 줄다리기 싸움처럼 보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거대한 심연을 느끼듯 그 어느 때보다 멀어 보인다. 둘 사이에 공통분모는 갈수록 적어지고 심지어 가장 하찮은 사안마저 논쟁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가짜 뉴스’는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 뉴스를 일컫는 표현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후변화와 백신, 그리고 선거 결과 같은 ‘사실’의 문제까지 흔들리고 있다. 저자는 탈진실의 시대에 인간의 조건이 되어버린 오만함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숙이 탐사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확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경멸과 우월감으로 무장한 채 파벌주의의 덫에 빠져버린 민주주의에 확실한 경종을 울린다.

진실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가짜 뉴스의 시대
내가 믿는 것이 곧 ‘나’이다
2016년 12월 에드거 웰치라는 남자가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워싱턴 DC의 한 피자 가게에 들어섰다. 인터넷 커뮤니티 〈포챈4chan〉을 중심으로 힐러리 클린턴과 다른 민주당 정치인들이 가게 지하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뉴스가 떠돌고 있었다. 웰치는 이를 자체 수사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지하에 아동 성매매 조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건물에는 지하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웰치의 행동이 터무니없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가짜 뉴스의 시대에 정보가 오염되고, 오염된 정보가 기이한 자기 확신이 되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을 웰치의 사례에서 발견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는 인터넷 기사 중 최소 60퍼센트가 그것을 공유한 사람마저 읽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리는 특정 의견에 동의하거나 혹은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기사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적 태도를 전달하기 위해, 특히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이때 소셜미디어는 ‘바로 여기에 분노를 느껴라’라고 지시함으로써 파벌주의를 강화하고, 결국 ‘확신을 양성하는 신병 훈련소’가 되어버린다.
확신은 자신이 바라는 자아상과 관련이 있다. 확신은 그저 확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삶에서 권위를 갖는다. 그것을 뒤흔들 증거가 눈앞에 있어도 사실이나 논리 자체를 거스르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을 방어하는 것은 정체성 자체를 방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웰치의 우스꽝스러운 작전을 지켜본 극우 미디어는 그가 민주당에 의해 고용된 배우라는 주장을 유포하며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켰다. 이런 상황은 여전히 기이하지만 조금도 낯설지 않다.
“트럼프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보다 똑똑하다”
저자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불을 지피는 이 파벌적인 자기 확신의 진짜 문제는 거짓을 진실로, 혹은 진실을 거짓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진실이 무엇인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양산하는 데 있다. 세상에는 트럼프의 트위터를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트럼프가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류 미디어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 사안을 트럼프가 기꺼이 입에 올린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트럼프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말할 때 분노, 억울함, 극도의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트럼프를 통해 그동안 무시당해온 감정과 과소평가된 경험들, 이를테면 기후변화는 사기라거나 이민자가 미국을 장악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비로소 재평가받는다.
우파의 확신이 기이하다면 좌파의 확신은 확실히 오만하다. 우파 사이에 대안적 위키피디아로 불리는 콘서버피디아에는 아예 ‘자유주의자의 오만함liberal arrogance’이라는 항목이 있다. “근거 없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건방지게 넘겨짚는 자유주의자들의 성향”으로 정의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실을 알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감하고 배려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가정하에서 많은 좌파는 마치 모든 보수주의자가 잘못된 가치를 좇을 뿐 아니라 멍청하거나 속임수에 넘어간 게 틀림없다는 듯 행동한다. 자신만이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우월감만큼이나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오만함을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오만함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무너진 공공 담론을 어떻게 바로세울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은 그저 우리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옳으며, 더 이상 서로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좌우 양쪽의 스펙트럼을 넓게 조망하며 ‘우리는 틀릴 수 없다’라는 오만이 정치를 어떤 위기에 빠뜨렸는지를 탐사한다. 파벌적인 확신과 오만함은 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지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해롭다. 타인에 대한 경멸과 우월감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자기 관점이 우월하다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인간으로서도 우월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오만한 사람들은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백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라고 쏘아붙인다. 혹은 멍청한 사람들이 정치를 수렁에 빠뜨린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이처럼 집요한 오해와 의도적인 경멸이 일상이 된 풍경 속에서 무너진 공공 담론을 회복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 질문을 바꿔 이제는 ‘우리는 어떻게 믿는가?’를 물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믿지 않듯, 우리가 믿는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과연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동시에 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정치적 관점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약이 있다. 우리는 그 약을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국회의원에게 주거나 상수원에 풀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약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극단적인 종교적 대립 상황에 진저리치며 스스로를 탑에 유폐시킨 몽테뉴, 전체주의 시대 진리와 정치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든 한나 아렌트를 경유해 다시 처음의 소크라테스 문답으로 돌아오는 여정 속에 저자의 답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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