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형,지일주 저/인문학 유치원 해설
이어령을 잘 몰랐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시대의 지성'이 떠났다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
책에서는 창조적 생각이 왜 중요한지, 왜 끊임없는 탐구를 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의 상상은 과연 어디까지 닿을지 짐작할 수 없다. 시대의 지성이란 수식어가 정말 잘 맞는 사람.
책을 읽는 내내 뒷덜미에서 소름이 짜르르 끼쳤다. 한 시대를 함께 한 그를 제대로 알아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추천 지수는 생략, 다만 구성과 편집이 아쉬운.
선생님의 말씀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만 같아서, 추천 지수는 생략했어요. (인터넷 서점에 올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점수를 달겠지만요.) 평생 문화를 생각하신 선생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만, "이 책은 나에 대한 용비어천가 같은 책이 되면 절대로 안 돼."(p.368)라고 선생님께서 밝히신 것과 달리, 이 책의 편집과 구성은 답변자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서고 있어 부담스러웠습니다. 때문에 담담하게 서술되었을 때 더 매력적이었을 답변자의 생각이 질문자의 어설픈 구성으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이하 내용은 인상 깊게 접한 선생님의 문장들을 개인적으로 인용한 모음집입니다. 직접 책을 통해 생각을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p.9)
★ (백만대군을 이끄는 장군이 될 팔자에 대해) "그런데 요즘 생각하면 그 사주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백만대군은 내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말(언어)이고 그것으로 공감을 함께 나눠온 독자들일 수도 있으니까. 칼을 그것보다 강하다는 펜으로 바꿔봐. 내가 휘두르는 대로 언어들은 내 명령에 따라 움직여왔어." (p.15)
★ "고독의 대가는 생각의 탄생이었어." (p.18)
★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는 평소 잊고 있던 '거리'를 자각하기 시작했지." (p.22)
★ "평탄할 때에는 만인이 평등해. 욕망도 비슷하고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창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커지지." (p.24)
★ "과연 나의 눈물이 남을 위한 눈물이 되었을까." (p.32)
★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잖어." (p.58)
★ "나는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확신범이 아니여. 확신범이라면 유언밖에 더 남겄어?" (p.58)
★ "도서관에 가보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얘기를 더 보태겠어? 다만 70억 지구인 중에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의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은 제각각 소중해요." (p.60)
★ "창조를 하려면 먼저 파괴를 해야 돼." (p.70)
★ "빈칸이 있어야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생기는 거지. 빈칸 없이 정확하게 말하면 끌어들이는 힘을 못 가져요." (p.107)
★ "문학이 언론이 되면 안 돼요. (...)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봐요. 그 '님'을 '일제강점기의 조국'으로 한정하면 그건 언론의 언어지 시의 언어가 아니에요." (p.124)
★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이 하얀 원고지 위에서 숨을 거두게 하소서.' (p.137)
★ "사람들은 일회성 행사에 왜 그 많은 돈을 낭비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질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태어날 때, 죽을 때도 한순간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있지 않은가." (p.155)
★ "만인이 납득하는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니지. 낡은 생각이라는 증거니까." (p.158)
★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최고의 해결 방법은 긴장을 푸는 유머야." (p.214)
★ "궁즉통은 몇 천 년간 강대국 사이에서 견뎌온 한국인의 창조력이자 돌파력이지." (p.247)
★ "질투 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내가 비참해지잖아. 대신 그 사람을 돕는 거지. 그러면 천재의 작업을 같이 하는 거니까." (p.348)
★ ('독립된 주체'로 우뚝 서는 삶은 어떤 경지일까요.)
-하루를 살아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삶이지. 누가 뭐라고 하면, 뉴스에서 무슨 보도가 나오면, 책 한 줄을 읽어도 뭐가 기이고 뭐가 아닌지를 제 머리로 판단하면서 사는 삶 말이야. 역사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야. 역사라는 건 안방 얘기 다르고 부엌 얘기가 다른 법이거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각 안방과 부엌에서 하는 얘길 들어봐. 안방 얘기 들으면 며느리 잘못이고 부엌 얘기 들으면 시어머니 잘못이지. 그렇다면 누가 옳은 거야? 그래서 지식인이, 지성인이 필요한 거야. 뜬소문, 가짜뉴스, 음모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경험주의를 넘어선 냉철한 이성의 힘을 가진 지식인 말이야. (p.369)
이 책은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인 저자와 ‘80년 창조적 생각’에 대한 생생한 대화의 기록이다. 인문, 예술, 철학, 역사는 모든 수업에서 한데 융합되었고, 어느 수업에든 그만의 시각과 해석이 녹아 있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해낼까?’ 그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데 모든 타자와의 거리를 발견한다. 그동안의 삶의 방식, 그동안의 삶의 속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을 침잠하다 보면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내면성이 강하고 시선이 안으로 향한 사람들은 방에 혼자 갇혀도 고독하지 않지만 평생 타인지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방에 갇히면 못 견뎌한다.
‘눈물 한 방울’ 이 말을 마지막므로 이 시대에 남기고 싶다고 하신다. 눈물로 치면 우리가 그리스보다 선진국이라고 했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벌써 그런 상황은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고 이 눈물 없이는 황무지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을 위해 아껴두었던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80여 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것을 거부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라고 했다. 50년 만에 풀린 제비의 비밀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 벌레를 먹은 새끼는 입을 덜 벌리고 배고픈 새끼는 더 많이 벌리니까 어미는 입 크키만 보면 누가 배고픈 새끼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령식 독서론을 부연하면 어려운 독서를 통해 추리력이 길러지고 뇌세포도 활성화된다. 아이들한테 수준 높은 책을 읽힐 필요가 있다. 아이마다 성향과 기질이 다 다르겠지만, 너무 단순한 내용의 책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두뇌개발을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어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수는 22세에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던짐 같은 식이다. 젊은 세대 기수론을 담은 일종의 선언문으로, 인습의 벽에 갇혀 시대의식을 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매몰된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한 글이었다.
80여 년에 걸쳐 이어령 교수가 쌓아온 창조물은 유무형을 망라하지만 그 최고봉은 역시 ‘말’이다. 도시의 자투리땅에 세운 작은 공원을 ‘쌈지공원’이라 이름 붙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보사회의 키워드로 제시한 학술용어 ‘디지로그’ 새천년 밀레니엄 베이비를 ‘즈믄둥이’도 그가 낳은 표현이었다.
‘이어령’하면 굴렁쇠 소년을 먼저 떠올린다. 88서울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대표적 창조물로 꼽히고,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로부터 칭찬과 감동의 피드백을 차고 넘치게 받았다.
노태우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연다’라는 기치 아래 문화 정책을 폈고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장관 취임 직후 문화행정에 딱딱한 관료주의의 벽을 허무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3불 3가’운동을 제안했는데 3불은 ‘문턱 없이 말하기, 생색내지 않고 말하기, 사심 없이 말하기’였고, 3가는 ‘문화의 우물가에 두레박 놓기, 부뚜막의 부지깽이 되기, 바위의 이끼 되기’였다. 계산 없이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야 조직에 활기가 돌고 창조적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것이 3불 운동의 취지였다.
한국 사람은 무엇이든 잘 버린다. 내버려에서부터 먹어버려, 쓸어버려, 잡아버려, 잊어벼려. 그런데 한국인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민족이다. 김치가 쉬면 버려야지 하지만 ‘두어’ 묵은지로 만들어 삼겹살을 싸 먹으면 기막히게 어울리고 화려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이어령 교수의 대표 타이틀 중 하나다. 새천년의 첫 순간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글로벌 방송으로 기획됐다. 영국은 우주장비를 이용해 불꽃놀이를, 미국 뉴욕은 타임스퀘어에서 4톤에 달하는 색종이 조각을 흩뿌렸고, 요르단 베들레헴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2000마리를 날려 보냈다. 한국은 새천년이 되자마자 태어난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 이른바 ‘즈믄둥이의 탄생’ 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세계를 향해 쏘자는 것이 이 교수의 계획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어령 책 두 권을 대출했고 [읽고 싶은 이어령]을 읽고 리뷰를 올리고 난 다음 날 이어령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우주에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이라는 말에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