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애정과 그리움의 편지
이 글에는 베벌리와 함께했던 평범한 일상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존 버거는 베벌리가 집에 있는 식물들에 물을 주던 모습이나 능숙한 솜씨로 운동화를 빨아 정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는가 하면 산책할 때면 앉곤 했던 벤치의 독특한 높이를 회상하며 기억 속 아내를 상상한다. “지금도 가끔 운전을 하며 그 벤치를 지날 때면,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는 우리 모습이 보인다오. 마치 영원함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베벌리와의 평화로운 일상을 가만히 돌아보는 존 버거의 담담한 어조는 오히려 더 깊은 울림과 고요한 쓸쓸함을 준다.
그에 의하면 베벌리는 신중한 사람, 소박한 사람, 세심한 사람, 말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 짧은 미소로 모든 걸 말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존 버거는 그녀에게서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세심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표현하며, 그것은 “고요하고 꿈을 꾸듯이 확신할 수 없는 길을 세심히 살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레마 하마미(Rema Hammami,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에 있는 비르치트 대학의 인류학 교수이자 여성학자)는 이런 베벌리에게 ‘날으는 치마(Flying Skirts, 이 책의 원제)’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이는 마치 치마가 바람에 나부끼듯 나는 모습이 그녀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모습’에 비견된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까운 이들의 그리움과 애정의 기록은 베벌리가 책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소.”
존 버거는 올해 여든여덟을 맞았다. 사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존 버거와 베벌리는 서로의 삶에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였으며, 그녀에 대한 존 버거의 애정은 실로 깊은 것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존 버거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을 가장 먼저 보아 주는 독자였고, 그 글에 대한 느낌을 말해 주거나 필요한 경우 새로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벌리가 병상에 누워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모르핀이나 코르티손 주사 등을 수시로 맞아야 했을 때를 회상하며 그가 “그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소. 그 아름다움은 당신의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지”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아내에 대한 존 버거의 애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이라는 잣대가 그의 인식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그가 자신의 글쓰기와, 베벌리와의 정신적 교감에 대해 언급한 다음 대목에서 존 버거의 삶에 베벌리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 또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당신의 반응을 기다렸던 거요. 나에게 글쓰기는 벗겨내는, 혹은 독자들을 발가벗은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는 형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발가벗은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우리는 함께했지. 우리는 사물들의 이름 뒤에 있는 것을 함께 꿰뚫어 보기를 원했고, 그러고 나면, 서로를 꼭 붙들었어. 그렇게 붙들고 있으면 나는 다시 혼자서 글을 써야 할 때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곤 했지.”
그녀의 영전에 바치는 마지막 선물
베벌리는 존 버거에게 오는 외부 편지나 이메일을 전달하고 답을 주는 일, 책 계약업무 등을 도맡아 했었다. 2004년 존버거의 아름다운 산문집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And Our Faces, My Heart, Brief as Photos)』을 처음 출간하고 모두 열두 권의 책을 내기까지, 열화당은 십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다. 존 버거와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 준 베벌리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가 2008년 책 사이에 끼워 열화당에 보내 온 뒤뜰에 핀 목련꽃을 표지 이미지로 실었다. 이는 그녀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우정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열화당 영혼도서관’ 총서 중 한 권으로 발행되었다. ‘영혼도서관 프로젝트’는 개인의 삶을 기록하여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한 인간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국민적 캠페인으로, 사람이 죽은 후 육신이 무덤에 묻힌다면 정신(영혼)은 자서전이나 전기, 평전 등 하나의 책으로 기록되어 남겨져야 한다는 취지이다. 이렇게 탄생한 책들이 꽂힐 공간이 바로 사단법인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이사장 이기웅)가 헤이리 예술마을에 건립 추진 중인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다. ‘열화당 영혼도서관’ 총서는 이 도서관이 개관하여 본격적인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이 진행될 경우 그 출판을 담당하게 될 시리즈로, 현재는 자서전, 회고록, 전기, 평전 등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시도하는 준비기에 있다.
지난 3월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파리에서 존 버거를 직접 만나 이 기획의 취지를 설명하자, 그는 “아내의 죽음 후에 이 책을 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며 공감의 뜻을 표했다. 이에 ‘열화당 영혼도서관’ 시리즈의 다섯번째 권으로 『아내의 빈 방』을 선보인다. 그동안 발행된 ‘영혼도서관’ 시리즈로는 『민영완 회고록』 『김익권 장군 자서전』 『교육의 발견』 『정해숙 자서전』이 있다. 알프스 자락 베벌리의 묘지 앞에도 작은 도서관이 마련되어, 한국어판을 비롯해 앞으로 출간될 여러 나라의 판본들이 한 권 한 권 꽂힐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