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나?‘명화가 시대마다 시스템과 패러다임을 바꾸며 변화를 추동하고 역사를 발전시킨다’라고 말하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 『부의 미술관』에서 독자는 8개 장마다, 그리고 페이지 페이지마다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가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켜 왔는지를 깨닫고는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이 책의 저자는 후기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회화(명화)에 투영되어왔고, 미술사를 드라마틱하게 바꾸어왔으며, 세계사의 흐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이 책을 집필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돈 단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욕망’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맥락에서 이 책의 핵심 콘셉트를 한 구절로 제시한다면 ‘세계사를 움직이는 욕망의 명화, 명화를 움직이는 욕망의 세계사 이야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가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며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은 14~16세기 이후 600여 년간 유럽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와 문화사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8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들 이야기 속에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가득한데, 일테면 이런 것이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페르메이르 집안의 3년 치 빵값으로 팔려 빵집 광고로 활용됐다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정물화와 풍경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을까?’,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적극적으로 양산했을까?’,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를 다빈치가 그리면 4,000년이 걸린다?’,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는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왜 황제 나폴레옹을 그린 두 그림 [나폴레옹 1세 대관식],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각도를 다르게 설정했을까?’, ‘피카소가 끊임없이 파격적인 기법을 탐구하고 창조한 이유가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의 밥줄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기성 제품 판매 전략에서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등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미술세계사에 관한 지적 호기심과 통찰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다.1.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당대 예술과 예술가가 치명타를 입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오히려 근대 시민 회화가 화려하게 꽃핀 이유는?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 미술사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했다. 프로테스탄트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와 조각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때까지 미술계의 큰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서 들어오던 주문이 딱 끊겼고, 예술가들은 글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그러나 놀랍게도 종교미술 파괴가 가장 심했던 17세기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는 오히려 ‘회화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근대 시민 회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 실제로 17세기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다. 어떻게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그림의 소비자가 교회?왕실 등 성직자와 세속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뀌었으며, 그림 소재도 성경 내용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과’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하는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러한 변화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2.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어떻게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했나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미술이 가진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건축, 회화, 조각, 인테리어, 보석, 패션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는 고대 유물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고전적인 기념 메달을 만들고 신문 보도를 통제하는 등 광범위하고도 정교한 미디어 관리와 홍보 전략으로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군복에서 건축까지 고대 로마제국을 철저히 모방해 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인으로 통일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전략을 계승했으며, 현대의 광고 기법은 이러한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을 원형으로 확립되었다, 그 밖에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백악관이 고대 신전 콘셉트로 지어진 연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수도 워싱턴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기념탑이 미국사와 관련 없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데에도 나폴레옹에서 시작된 근대의 고대 제국 부활 움직임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나폴레옹은 그림을 어떻게 정치적 선전 도구로 교묘히 활용했을까? 먼저, 루이 14세의 초상화와 나란히 역사교과서 등에 자주 등장해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단순한 허구를 넘어 ‘상징 이미지 조작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몇 가지 이유를 짚어보자. 첫째, 이 그림의 가장 큰 허구는 나폴레옹이 탄 백마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를 모델로 백마를 그렸으나 알프스를 넘을 때 실제로 그가 탄 말은 당나귀와 말의 교배종으로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나폴레옹 사후에 그려진 다른 작품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반영해 험한 길에 강한 노새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용모도 실제 모습을 반영하여 왜소하고 땅딸막한 체형으로 그려졌다. 그와 달리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외모를 이상화해 나폴레옹을 키가 훤칠한 미남자로 그렸다. 다비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그림의 화면 아래 바위에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의 성을 적어 넣었다. 이는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가서 로마군을 격퇴한 고대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과 서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프랑크 왕국을 세운 샤를마뉴 대제라는 전설적 영웅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전설적 영웅’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근대 황제의 공식 이미지로 몇 점의 모사화를 제작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유포하는 홍보물 역할을 해왔다. 이 그림은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 실리면서 영웅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역할도 했다.영웅을 넘어선 초인 나폴레옹 이미지 홍보에 크게 기여한 그림에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이 있다. 이탈리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종군화가로 동행했던 앙투안 장 그로의 작품인데, 그가 발휘한 이미지 전략 효과는 탁월했다. 화가는 오늘날 홍보 대행사의 전문가가 기자들에게 뿌리는 보도자료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교묘한 솜씨를 이 그림에서 구현했다. 이 작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페스트라는 역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화가가 황제 나폴레옹에게 불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이자 콘셉트였다. 화가는 이 그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종교 회화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는 장면을 그린 회화의 구도와 공식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불세출의 영웅이자 황제인 나폴레옹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구세주’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고자 한 것이다.그는 주인공 나폴레옹뿐 아니라 배경 인물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고 나폴레옹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치밀하게 활용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 뒤에 서 있는 사관이 그런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인데, 그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 코를 감싸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야전병원에서 풍겨 나오는 끔찍한 냄새와 참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관은 나폴레옹이 환자를 만지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듯한 자세로 그려져 페스트 전염력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구도와 묘사는 세속의 규범을 초월하는 나폴레옹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다.화가는 화면 속 나폴레옹을 ‘옆얼굴’로 보여준다. 그는 왜 이 구도를 선택했을까? 이는 초인적 영웅 나폴레옹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화가는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이 구도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를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둔갑시켰나?오늘날 한 점에 몇 백억 원을 호가하는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한때 잡동사니 취급을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말하면 놀라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한때 허접쓰레기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는 어떻게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19세기 프랑스 파리를 주름잡던 천재 미술상 폴 뒤랑뤼엘의 피나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폴 뒤랑뤼엘이 본격적으로 판매에 착수하던 시점에 인상주의 작품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선 전위예술로 푸대접받았다. 당시 프랑스 유력 일간지 《피가로》는 인상주의 그림을 고양이가 앞발로 괴발개발 그린 낙서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혹자는 고양이가 피아노 건반 위를 걸을 때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 같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는 형편없었고 공짜로 주면 불쏘시개로나 쓸까 돈을 내고 사갈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 없는 회화였다. 게다가 붓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인상주의 그림은 회화의 기본도 모르는 어설픈 초보 예술가들이 끄적인 낙서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미술상의 창고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악성 재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림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모네는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였고, 고흐는 평생 불우하게 살다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천재 미술상 폴 뒤랑뤼엘은 마치 무대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모자 속에서 살아 있는 토끼를 꺼내듯 인상주의 화가들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시켰다. 그는 과연 어떤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여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상주의 그림을 부르는 게 값인 명품으로 둔갑시켰을까? 그가 사용한 마케팅 기법은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매장에 화려한 소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고객의 넋을 빼놓은 다음 웃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방식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상황에서 고객은 분위기에 취해 가격표에 높은 금액이 붙어 있을수록 지갑을 활짝 연다. 고객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이런 심리 전략은 오늘날 마케팅 분야의 기본이 된 기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일테면 이런 식이다. 고객이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그를 마치 유명인라도 되는 듯 정중하게 모신다. 유명인사 기분을 맛본 고객은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이성이 마비된다. 그렇게 황홀함에 취한 고객의 눈앞에 명품으로 포장한 상품을 내미는 것이다.설령 상품이 과거 인상주의 그림처럼 고객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이런 식의 연출은 상품을 유서 깊은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고객을 왕처럼 모시는 전략은 그가 그 전략에 어울리는 신분이라고 믿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돈을 아끼려는 쩨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은 체면이 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가격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이 마케팅 전략은 최고의 ‘분위기 연출’과 질 높은 ‘서비스’라는 두 가지 기법이 만나 잘 어우러지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말하자면 상품을 본 고객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얼떨결에 ‘그걸로 주세요’라고 말하게 하는 마술 같은 마케팅 기법이다.19세기 파리의 미술상 폴 뒤랑뤼엘은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마케팅 전략의 선구자였다. 그는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화려한 루이 15세 시대 궁정 양식을 대표하는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선택했다. 그는 왜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왕실 문화가 몰락하고 근대 시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에 하필 루이 15세 시대의 화려한 궁정 문화를 상징하는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상주의 회화 마케팅에 과감히 도입했을까? 폴 뒤랑뤼엘은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밀어붙였는데,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그림을 구매하는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고객이 보기에 인상주의 그림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상품이었다. 그러므로 가격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덜컥 사들였다가 가격 폭락 사태라도 벌어지면 큰일이다.폴 뒤랑뤼엘은 이러한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작품이 가격에 합당한 고급품이며 값을 지불한 후에도 가격이 내려갈 걱정이 없음을 홍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인상주의 그림을 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맥락에서 금테 액자는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였다. 왜냐하면 왕조 양식 약자에 넣은 작품에는 은연중 왕실 화가의 명품과도 같은 품격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이 소장해온 명품의 품격이 느껴지는 황금 후광을 둘러주는 장치가 바로 ‘금테 액자’였다.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잡동사니 신세에서 벗어나 차츰 명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인상주의 회화를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변신시킨 또 하나의 강력한 티핑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약하던 19세기에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에서 많은 대부호가 출현하고, 그들이 전 세계의 도시를 다니며 명품을 사들이기 시작한 흐름과 폴 뒤랑뤼엘의 ‘인상주의 회화 명품 만들기’ 전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19세기 당시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유능한 인재가 전 세계에서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나라였다. 또한 이 나라는 경제적 활력이 넘쳐나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과 격식 등 문화 자산의 결실로 볼 수 있는 귀족 제도 자체가 없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신흥 부유층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허무함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부유층은 자신의 허영심과 허무함을 채워줄 수단으로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고, 그것이 폴 뒤랑뤼엘의 ‘인상주의 회화 명품 만들기’ 전력과 요철처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