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2009, 열린책들)』는 원작보다 다양하게 변주된 형태의 이야기가 더 유명하다. 배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드라큘라 백작으로 분한 현대판 드라큘라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으니 내게도 원작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의 스토리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읽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소설은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한 드라큘라 백작의 성을 찾아가는 ‘조너선 하커의 일기’로 시작한다. 이야기 초반부에 조너선 하커가 드라큘라 백작의 첫인상을 묘사하는데 섬뜩하다. 미드 『드라큘라』에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매력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특이한 관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억센 독수리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콧날이 날카롭고 콧마루가 오똑하며, 코끝이 삐죽하게 아래로 숙어져 있다. (...) 입매는 딱딱하고 조금 잔인한 느낌을 주었고, 기이하게 날카로운 하얀 이가 입술 위로 비죽 나와 있는데, 그 입술이 유난히 붉어서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싱싱함을 느끼게 한다. 또 귓바퀴는 파리하고 끝이 매우 뾰족하다.(상권 p.37-38)
『드라큘라』 ‘상권’은 조너선 하커가 트란실바니아 드라큘라 백작 성에서 경험한 무시무시한 사건과 드라큘라 백작이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영국으로 들어오는 과정 그리고 미나 머레이의 친구 루시 웨스텐라가 흡혈귀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지금까지 ‘드라큘라’를 향한 공포는 없었다. 드라큘라는 저주받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낭만의 대상에 더 가까웠다. 드라큘라 백작은 심장이 뛰지 않는 죽은 육체를 가졌지만 과거에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로맨티스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후 나는 가로등 불빛만이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창밖을 쳐다보기가 두렵다. 루시 웨스텐라가 메모에 남긴 창문에서 철썩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상권 p.250)는 문장과 창밖에서 커다란 박쥐 한 마리(상권 p.251)를 보았고 그것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겁에 질렸다는 내용이 소름끼치고 으스스했기 때문이다.
‘하권’에서는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영국으로 온 드라큘라를 제거하기 위해서 반 헬싱 선생, 아서 홈우드, 잭 수어드 박사, 퀸시 모리스 그리고 조너선 하커와 미나 머레이가 힘을 합쳐 투쟁하는 과정을 그렸다. 드라큘라는 산 사람의 피로 몸을 살찌울 수 있고 더 젊어지기까지 하며 생명력은 더 강해지며(하권 p.414) 동물을 부릴 수 있고 이리와 박쥐로 변신할 수도 있으며 안개 속에 몸을 숨겨 은밀하게 움직일 수도 있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과의 대결에서 우세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인간과 흡혈귀의 대결은 드라큘라가 무기력하게 쫓기면서 시시하게 끝나버린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소설 『드라큘라』를 읽고 나서 지금껏 스토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았던 「드라큘라」는 관객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사랑’이란 감정을 삽입해서 각색한 작품이며 동명 원작 소설과는 다르다. 흥미나 재미 측면에서는 각색한 작품에 점수를 주고 싶지만 공포만을 두고 보면 원작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정형화된 흡혈귀의 이미지를 잊고, 묘사된 내용에 중점을 두고 읽어가면 좀 더 흥미롭게 하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더 이상 ‘드라큘라 백작’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 캐릭터가 아니다. 하권은 캐릭터보다는
인간과 흡혈귀의 대결 구도에 중점을 둔다. ‘반 헬싱 박사’가
이끄는 어벤저스와 전인류를 불사귀로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드라큘라 백작’의 대결이라고 하면 너무 촌스러운가? 어쨌든 내용은 그렇다.
그렇지만 액션 활극이라고 하기에는 ‘드라큘라
백작’의 활약이 너무 약하다. 영국에서의 최초의 희생자였던
‘루시 웨스텐라’의 절친이자, ‘조너선 하커’의 부인인 ‘미나
하커’의 목에 송곳니를 꽂는 것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이후로는 도망다니기에 급급하다.
‘드라큘라 백작’의 은신처에서 단 한 번의 맞닥뜨림에서 줄행랑을 치시고는 그 길로 ‘트란실바니아’의 자신의 성으로 36계... 물론 ‘반 헬싱 박사’와 ‘어벤저스’가 제대로 쫓아오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연막을 흘리면서 달아나지만 소설이 끝나기 위해서는 어찌되었건 다시 한 번
만나서 담판을 져야 하는 법.
‘트란실바니아’의 자신의 성 지척에서 ‘드라큘라 백작’의 힘이 세상을 뒤덮는 일몰 전에 ‘반 헬싱 박사’의 일행과 마주친다. 자신의 관 속에 누워있는 태양 아래의 ‘드라큘라 백작’은 얼마나 볼품없고 힘없는 존재인지… 단 한 번 휘든 칼에 머리가 날라가고, 심장에 단검이 박히는 순간에
재로 산화하여 흩어진다.
너무 시시하다고 해야 할까? 태양 아래
설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로 수 백 년을 걸려 계획한 인류 정복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수없이 많은 흡혈귀와 뱀파이어의 이야기들이 재생산되고 있는가
보다.
흡혈귀와 뱀파이어가 태양 아래에서 최소한의 운신만 할 수 있어도 혹은 꼭 지정된
장소가 아닌 어느 곳에서라도 한낮의 태양을 피할 수만 있어도 그들은 훨씬 강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좀 더 액션 활극에 어울리는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한 일 아닐까? 그래서, 나온 캐릭터가 ‘블레이드’ 정도?
아니면, 저주 받은 불멸의 삶에 갇혀
있는 흡혈귀들의 고독한 삶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내용이 이젠 가물가물하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가운데 나에게 가장 매혹적인 흡혈귀 이야기는 흡혈귀를 사랑하게 된 어린 소년의
인생을 그렸던 ‘렛 미 인’이었던 것 같다. 두 편의 영화로만 접했지만 언젠가 원작 소설을 읽어볼 기회가 생기겠지…
(BOOK : 2017-010-0198)
드라큘라를 읽기 전부터 듣고 본 것이 많은 상태였다는 것이 아쉽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봤다면 훨씬 재밌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역시 '드라큘라'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커다랗고 음산한 성에 살며 송곳니로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마늘과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관에 들어가 잠을 자고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드라큘라 백작. 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브램 스토커가 극장 경영자이자 당대 최고의 명배우였던 헨리 어빙의 매니저로 활동했다기에 그 둘을 검색하던 중, 브램의 성(性), 스토커(Stoker)가 ‘증기기관에 석탄을 퍼 넣는 화부를 뜻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도 드라큘라를 처단하기 위해 이동수단으로 이용한 기차 증기관에 석탄을 넣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증기기관을 이용한 놀라운 과학 혁명으로 증기선과 기차를 들 수 있는데, 드라큘라와 그를 무찌르기 위해 뭉친 반 헬싱 무리들도 그 둘을 이용하는 게 나온다.
브램이 51세인 1897년에 쓴 이 소설은 ‘흡혈귀를 다룬 모든 소설은 어떻게 해도 이 소설의 그늘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 만큼 흡혈귀 문학 사상 최대의 걸작이라고 평해진단다. 더욱 반가웠던 건, 이 소설에 무려 ‘조선’이 딱 한 번 언급된다는 점이다. 아래 [나무위키]의 문장은 그에 대한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스토커가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흡혈귀에 대한 연구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하면, 작중 반 헬싱이 중국에도 흡혈귀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흡혈귀에 의해 벌어진 소동이 아니라, 흡혈귀란 존재 자체를 해부 분석했다고 볼 수 있다.”
검색한 내용 중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브램 스토커의 미망인인 플로렌스 스토커(1858~1937)가 남편의 허락 없이 영화화된 것을 가지고 남편 사후 ‘저작권 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를 흥밋거리로 본다는 자체가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참 부끄러운 한편 부인의 처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미국 유니버셜에 판권을 팔았다는 데에는 납득이 잘 안되지만 그 덕에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치렀던 걸 감안하면 잘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들인 제작비의 거의 20배가 넘는 수익을 얻었다니. 이후 한 유명 배우의 매니저이자 무명작가로 사장될 뻔했던 드라큘라의 작가는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명예를 얻게 되는데, 1987년부터 호러 작가협회에서 그의 이름을 딴 ‘브램 스토커상’이 제정되었다고.
반 헬싱 무리들을 보자니 문득 소설 『삼총사』가 떠올랐다. 사실 그들이 하려는 드라큘라 처단은 미나의 영혼을 되살리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두머리인 그를 죽여 인류가 드라큘라의 세상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일의 대의라고 할 수 있겠다. 하편은 그에 이르기 위한 인물들의 행적이 담긴 일기를 통해 찬찬히 따라가는 형식이다.
상편에 비해 하편은 몰입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이 불필요하게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많이 지루했다.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확실히 덜어내기의 미덕이 아쉬웠다. 차라리 상편에 결말을 추가해 단권으로 깔끔하게 끝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완독 후 여러 버전의 드랴큘라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연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점은 큰 수확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