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일본 간토 지역이 초토화됐다. 원인은 지진이었고 천재지변 앞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무기력했다. 어떻게 하면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까. 고민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위기 앞에서 공동의 적은 단결을 부른다. 그들이 지목한 건 조선인이었다. 우물에 독을 타 일본인을 학살하려 든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됐으며, 무고한 조선인을 살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두 인물 모두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그 중 가장 큰 계기를 꼽자면 지난해 개봉한 영화 <박열>이지 싶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는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선 재조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지니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 탓이었다. 여전히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많은 상태에서 한 권의 책을 접했다. 제목은 <가네코 후미코>. 일본인이었음에도 자국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던 이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아나키스트. 우리 식으로 풀어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싶다.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암살 테러 등의 격한 방식으로 사회악으로 군림한 인물들을 제거하는, 이는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그들의 방식은 모두의 주목을 받고도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허나 그들은 겉멋에 찌든 테러리스트는 결코 아니었다. 국가나 민족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계열과 달리 그들은 모든 권력을 거부했다. 후미코는 아나키스트였기에 일본인이었음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책은 이 인물의 태생적인 불운부터 다루기 시작했다. 시대가 암울했고, 일반적이라 부를 만한 범주는 일찌감치 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은 여느 사람의 것보다도 더욱 모질었다. 우리나라도 그러하지만 일본 또한 가계를 따지는 분위기가 강한 모양이다. 무(호)적자로서 산다는 건 일상에서 수시로 차별과 맞닿뜨려야 함을 뜻했다. 제도 또한 사람을 사람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사정하고 또 사정해야 했는데, 그렇게 힘겹게 학교 안에 발을 들여도 교사나 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 시대의 가부장제는 견고했다. 매우 똑똑했으며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으나 여성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비천한 신분의 여성에게 학습을 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얌전히 있다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재간을 지닌 남자와 결혼하라고 강요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억압적인 배경에서 성장하면서 기성 가치관에 대한 반감은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 박열은 거친 인물이었다. 우선 겉모습부터가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 등 그가 몸담았던 단체에선 어딘가 모르게 어둔 냄새가 풍겼다. 폭탄을 입수해 일왕을 암살하려 들었다는 그의 거대한 계획 또한 무시무시했다. 후미코는 박열과 뜻을 같이 했다. 결혼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나누는 진정한 동지로서 함께 하려 했다. 이 결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태는 분명 아니었다. 일단 두 인물이 모두 옥중에 있었다. 결혼에 앞선 동거생활에 들어가면서도 그들이 한 약속은 의미심장했다.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제거할 것,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사실 조금은 허망했다. 일왕 암살 계획이라 하는 것의 실체는 없었다. 일제는 제 입맛대로 요주의 인물을 골랐고, 전혀 구체적인 계획을 지니지 않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만들고자 안달했다. 어차피 의도는 분명했으므로 거절하는 게 불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두 인물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며 후미코는 숱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자살. 어떠한 서신 왕래도 허용되지 않는 숨막힘 속에서 이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었다고 사람들은 평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자살이 맞는지 등 알고픈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고인을 욕보이려는 건 아니다. 다만 시대가 품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이 크다.
박열의 이후 행적을 놓고서도 왈가왈부 말이 많다. 후미코보다도 더욱 견고한 사상적 토대를 지닌 것 같았던 그는 진정 전향했던 것인가. 전쟁 통에 북한으로 (아마도 납북되어) 갔고, 1974년 그가 북에서 사망했다는 게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다. 만일 후미코가 살아남아 박열의 삶을 끝까지 지켜 보았더라면 어떤 평을 남겼을지, 그럴 수도 있다며 수긍했을까, 아니면 변절이라 욕했을까. 이 또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