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네이 엥겔른 저/김문주 역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저/황가한 역
도리스 레싱 저/김승욱 역
배윤민정 저
오찬호 저
박이은실 저
지금은 그런 일이 없을 테지만,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반장은 꼭 남자였고, 여자는 부반장이었다. 그 땐 그게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진학 후엔 여자라는 아유로 가정(가사) 과목을 들어야만 했다. 요리, 바느질, 뜨개질 등은 무딘 손을 타고난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허공에 손을 놀리느라 바빴고, 내가 해내지 못한 것들은 자연스레 엄마의 몫이 되고는 했다. 나이가 듦에 따라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 능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늘고 있다. 요리를 전혀 못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디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님을 나날이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것들이 존재한다. 왜 결혼도 안 한 여자가 화장도 안 하고 다니느냐는 말에, 여자라면 치마도 입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발끈한다. 대놓고 큰소리치지 못하는 건 원체 소심한 성격을 타고 난 탓이 클 테지만, 난 나를 의심한다. 혹 무슨 여자가 저래 소릴 들을까봐 두려워 그러는 건 아닐까라고.
삶에 정답은 없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형태의 삶은 존재할지 몰라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규정하는 특정한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 남자라면/여자라면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사고는 직, 간접적으로 강제되고는 한다. 최근에는 성평등을 지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적잖은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가 혹여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행해지는 압박은 그로 인해 많이 줄었다. 문제는 대놓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지 않아도 그간 형성돼 온 흐름이라는 게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가정 내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말 그대로 도처에서 우리는 남자/여자다울 것을 요구 받는다. 그게 뭔지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면서.
교육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 짓는다. 학창 시절 어떠한 교사, 또래를 만났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학교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는 매우 격렬한 경쟁이 만연해 있다. 학생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오로지 ‘대입’ 하나의 초점을 맞춘 채 모두가 경주마가 되어 열심히 달린다. 과정마다 자신이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비롯하여 많은 것들을 물어야 하는데 높은 수능 점수만을 기대하느라 바뻐 그러지 못하고 있다. 좋은 교사는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를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지향할 수 있도록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 또한 가르쳐야 하는 게 교사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사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치 않는다. 내 자녀의 성적을 높임으로써 보다 낫다 여겨지는 대학으로의 진학을 이끄는 교사를 이상적이라 여긴다. 평등이 좋긴 하지만 페미니즘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매우 ‘위험하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여기고, 학생들에게 자신이 지향하는 성평등 사회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곧잘 공격을 받는다. 우직하게 제 뜻을 펼치는 이들도 물론 존재할 테지만,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때론 진심에 반해 행동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교사도 이러한데 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지극히 중립이라 여겨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다. 과연 나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 하고픈 말이 많음에도 침묵하곤 했던 순간들이 혹 나의 여성성을 증명해보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나로 인해 의도치 않게 ‘남성다움’ 혹은 ‘여성다움’이 왜곡되진 않았을지를 묻게 된다.
나 땐 성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너무도 미약했으며 모두가 외면했을 수도 있다. 그 시절로부터 우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왠지 조금 더 교묘하게 성차별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꾸만 비틀리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교육 일선에는 보다 많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절이 오기 전에 모든 정규 교육 과정을 끝마쳤다는 점이 나로서는 아쉬울 따름이다.
딸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페미니스트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윤리과목을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수업 시간에 TV 속 광고와 드라마, 오락물에서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나타나고 소비되는지 영상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이다. 윤리 선생님 시간에는 조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하던 때라 딸아이와 대화가 잘 통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영향력은 정말 크다는 걸 느꼈다.
이 작은 책의 출발은 작년 여름 인터넷 매체 <닷페이스>를 통해 시작됐다. 학교 교육 현장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발언이 퍼지면서 찬반 논쟁을 넘어 인신공격과 비방, 신상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목소리는 이랬다.
"왜 학교 운동장엔 여자아이들이 별로 없고 남자아이들이 주로 뛰놀까? 이상하지 않아요?"
"페미니즘은 인권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가정이나 사회나 미디어에서 여성혐오를 배우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대로 사회에 나가면 차별하거나 당하는 사람으로 자랄 거예요."
"공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페미니즘만큼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선생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에서 '#우리에겐_ 페미니스트_선생님이_ 필요합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고, 그 시기에 방한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도 동참하는 등 여성 인권단체와 정치인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하게 된 이 책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작가 다섯 명과 페미니스트 선생님 다섯 명의 목소리, 그리고 한국의 성차별 교육에 반대해 페미니즘 교육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남자고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는 최승범 선생님은, "'남자답게'를 폭력적으로 과시하고, '따먹는다'며 여성을 대상화"하고, "욕설의 상당수는 여성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처럼 "여성을 성취의 보상물로 여기는 급훈도 많"은데다 "PC방 모니터 속의 남전사들은 커다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싸우지만, 같은 게임의 여전사들은 가슴이 반쯤 드러난 복장으로 남전사를 치료"하며, "청소년의 26.7%가 본다는 1인 방송(김남영, <돈 벌이에 이용되는 여성혐오 콘텐츠>, 《시사 IN》, 제 520호)의 BJ들에게 여성은 성욕의 배출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쟁 나면 ○○여고에 쳐들어간다"는 말을 하는 아이가 있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남학생들의 성 인식이 낙후돼 있을 뿐 아니라 SNS를 통해 여성혐오를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한편, 그간의 페미니즘 교육을 통해 달라진 남학생들의 인식을 설명한다.
페미니즘 연구자 김애라는 학교 교육을 맡고 있는 페미니스트이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닌 선생님들에게 다섯 가지 제안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첫째, 성별에 따라 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게 해주"기. "둘째, 같은 또래, 같은 성별이라도 모두가 얼마나 다른지 가르쳐주"기. "셋째, 여성과 남성이 각기 서로의 짝, 한 쌍이라고 가르치지 말"기. "넷째, 평등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 차이와 더 가까운 것임을 알려주"기. "다섯 째, 여성과 성소수자 혐오 표현, '패드립(패륜드립)'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비판해주"기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선생님들이야말로 솔선수범해 성고정관념을 없애도록 지도해야 한다.
몇 년 전 몇몇 명문대 남자 대학생 단톡방에서 오간 여성혐오 발언이 드러나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당시 정말 기막히고 이해할 수 없던 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한 지인에게 물은 적 있다. 배울 만큼 배운 똑똑한 남학생들이 왜 그렇게 야만스럽고 무지한 여성혐오 인식을 하고 있는지. 지인은 한마디로, 가정과 학교에서 인성 교육은 부재하고 공부만 잘하면 뭐든지 용서되는 분위기 탓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의 페미니즘 교육은 성평등 교육이자 인권 교육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민주 시민 교육이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책 속의 수많은 목소리에 공감한다. 이 작은 책이 성평등한 교육현장을 만드는 데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