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욱 저
정영욱 저
2019년 03월 05일
2018년 07월 18일
1·2차 세계대전의 상흔, 가난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나이나 경험이 사람을 반드시 성숙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지만 도리스 레싱(1919~2013)의 작품엔 그가 겪은 고난이 다양한 결로 드러난다.
레싱의 단편집《19호실로 가다》를 읽.었.다.
11편의 단편을 모두 읽기는 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채는 건 더 어려웠다.
눈이 줄거리를 따라가는 동안 마음을 차지하는 감정,
불편함.
레싱의 작품에는 보일 듯 말듯 보호색을 띠고 자리 잡은, 애매한 폭력과 불평등이 존재한다. 화내면 속 좁은 사람 될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만만해 보일까봐 피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을 짚어준다. 그래서 고마웠다. 이런 이름도 없는 애매한 불편함을 얘기해줘서.
부족한 문해력과 일천한 지식 탓에 11편이 모두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중 기억에 남는 4편을 골라 소개하려 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방송국에서 인터뷰 작가로 일하는 중년 남자 그레이엄. 그는 작가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그 공허함을 새로운 여자를 만나 ‘손에 넣는’ 일로 해소한다.
이번 타깃은 바버라 콜스. 잘 나가는 무대 미술가다. 인터뷰를 핑계로 바버라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이 여자, 그레이엄에게 관심이 없고 그저 일만 한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추근대고 결국 그녀의 집까지 따라간다. 그래도 반응이 없는 바버라. 그를 남자로 봐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귀찮아한다. 열심히 시도하지만 나중엔 성욕도 사라지고 자존심만 남았다. 결국 그녀를 ‘손에 넣는’데 실패하는 건가
그럴 수는 없다.
‘아, 하느님, 이 촌뜨기를 이제 떼어버릴 수 있어!’ 정말 헤픈 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p.59)
<옥상 위의 여자>
어느 여름, 옥상 위에서 젊은 여자가 누워 일광욕을 한다. 마침 근처 건물 옥상에서 세 남자가 홈통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 중년의 해리, 새신랑 스탠리, 열일곱 살 톰. 그들의 눈은 모두 여자에게 향한다. 다음날도 여자는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고 남자들은 여전히 그녀를 훔쳐보며 비난한다. “나쁜 년.”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작가는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자기를 지켜보는 세 남자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 때문에 세 사람 모두 화가 났다.’(p.68)고.
일광욕만 할 뿐 그들을 신경 쓰지 않던 여자가 어느 비 오는 날 옥상에 나타나지 않자 톰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하늘이 당신 버릇을 고쳐 놓았군, 그렇지? 아주 제대로 고쳐놓았어.’ (p.80)
<한 남자와 두 여자>
디자이너인 스텔라와 그녀와 친한 화가인 브래드퍼드 부부가 등장한다.
스텔라와 잭 브래드퍼드는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잭의 아내 도로시는 아직 무명이다. 안목 없는 대중이 주는 상업적인 성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고 서로의 예술세계를 존중한다.
방송기자라는 남편의 직업 덕분에 몇 달씩 떨어져 지내야 하는 스텔라 부부와 달리 잭과 도로시는 가난하지만 모든 걸 함께하며 자주 여행을 다니는 행복한 부부다. 그러던 중 도로시가 임신을 하고 그들은 시골에 정착한다.
어느덧 아기가 태어나고 스텔라가 그들을 찾아간다.
아기가 생긴 부부. 더 행복해졌을까
“아기를 낳고 나니 내 안의 창의성이 전부 죽어버렸어. 임신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 도로시가 말했다. (p.119)
태어난 지 6주밖에 안된 아기를 키우면서 창의성 운운하는 엄마라니. 갓난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24시간을 저당 잡힌 삶이 아닌가. 오랜만에 만난 스텔라에게 도로시는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잭이 가끔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밤이고 낮이고 허구한 날 잭이랑 같이 갇혀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혀.”(p.123)
10년 넘는 결혼기간 동안 부부가 계속 함께 지내야했던 끔찍함, 남편의 외도를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신경 쓰이는 상황.
무엇이 문제일까
<19호실로 가다>
<한 남자와 두 여자>보다 더 완벽한 부부가 등장한다.
유능한 남편 매슈, 역시 유능하지만 가정을 위해 전업주부가 된 수전.
정원이 딸린 큰 집, 착하고 건강한 네 아이, 파출부, 자동차, 그리고 수많은 책을 읽은 지적인 부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런데 가끔 수전은 자신이 가진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힘들어서인가. 그녀는 작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도 모두 등교하고 마침내 수전은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이상하다. 수전은 집안 어디에 있어도 혼자일 수 없었다. 욕실, 빈 방, 매슈가 정해준 지붕 밑 ‘엄마의 방’에서조차도.
“저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있고 싶어서 이 호텔을 찾아왔어요.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서요.”(p.305)
혼자만의 방이 필요한 수전이 찾아낸 곳은 어느 허름한 호텔의 19호실.
집안의 모든 공간이 그랬듯 그곳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찾아온다. 수전의 19호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와 <한 남자와 두 여자>는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대할 줄 모르고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찌질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 폭력이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남자들의 심리를 잘 아는 여자가 등장함으로써 그나마 위협도 못되는 찌질함으로 그려진다. 자신을 거부하는 여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찌질남들은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여자들이라고 해서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세상의 여자는 오직 두 종류가 있을 따름이다.
나쁜 년과 헤픈 년.
<한 남자와 두 여자>와 표제작 <19호실로 가다> 역시 비슷한 결로 묶인다.
완벽한 가정의 그녀들은 왜 불행할까
내가 생각하는 첫째 이유는 경제력이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등장인물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무시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돈이 숨어있다. 도로시는 남편과 늘 함께하는 생활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가 싫어하는 건 ‘남편과 함께 한다.’는 그 자체보다 ‘남편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삶의 형태 또한 남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는 그녀의 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도 마찬가지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남편은 일에, 아내는 가정에 집중한다. 남편의 수입이 넉넉하고 부부의 생활에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수전은 허름한 호텔의 숙박료 몇 푼마저도 남편에게 일일이 받아야하는 처지다. 물론 지적이고 성실한 남편이 아내에게 돈의 용도 따위는 묻지 않지만 이것은 배우자의 지성이나 인성 문제가 아닌 헤게모니의 문제다.
둘째 이유를 들자면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
아이가 딸린 도로시에게도, 모든 물리적 노동에서 벗어난 부유한 주부 수전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흔히들 남자에겐 동굴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동굴은 남자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은퇴한 부부가 갈등을 빚고 황혼이혼을 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 남자들이 집안일을 할 줄 모르고 아내의 보살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더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쓰고 보니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조건으로 1년에 500파운드라는 고정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난다. 글을 쓰는 데만 돈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겠는가. 모든 인간에게는 돈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덧
작가도 <19호실로 가다>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수전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 그녀가 남편에게 19호실로 가는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 외도를 핑계대는 부분이 너무 안타까웠다. 19호실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대신 19호실로 가는 수전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을까. 남편으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의 이해와 상관없이 (심지어 작가에게도 이해받지 못하지만)수전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을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것 또한 수전에게는 참을 수 없는 폭력이 아니었을까.
책 제 목 | 19호실로 가다 |
저 자 | 도리스 레싱 / 김승옥 |
출 판 사 | 문예출판사 |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영국의 패미라고 해야 할까요? 남성들은 불륜을 저질러도 되고, 여성들은 참아야 하는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나 봅니다.
19호실로 가다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단편은 짧은 글들이 모여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막상 어떤것을 집중적으로 봐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듭니다. 책 제목을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지? 저자에게 물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돌아 가셨습니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는 남성과 여성이 나옵니다. 남성은 결혼을 했고 바람을 피웁니다. 여성은 사회에 진출해서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하나의 성으로만 보고 그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접근을 합니다.
넌 나에게 넘어올거야, 넌 나와 잠자리를 가질거야 라는 생각으로 여성에게 접근합니다. 남성의 직업이 기자로서 기회가 찾아오고 인터뷰를 하면서 치근덕 거립니다. 여성은 배고파서 밥을 먹고 싶지만, 남성은 술로 여성을 이기려고 합니다. 방송국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면서 남성은 여성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여성은 졸리우니 커피 빨리 먹고 가라고 합니다. 남성은 여성의 호의가 자신에 대한 암묵적 합의라 생각하고 여성에게 키스를 하고 잠자리를 하려고 합니다. 여성은 니가 하고 싶은 일을 빨리 하고 가라면서 자신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남성은 일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 버립니다.
남성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여성과 함께 였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이였습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 가지는 속물에 대한 부분을 가감없이 이야기 합니다. "옥상 위의 여자"는 옥상 위에서 썬텐을 하는 여자를 보면서 여성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세명의 남성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신하지 않다. 어떻게 저러고 있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성은 여성에게 접근을 합니다. 막상 여자는 귀찮아 합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톰은 당황했다. 꿈에서는 그녀가 그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이 왕처럼 당당하게 앉아 있는 침대로 평생 처음 맛보는 술을 가져다 주었는데. 자신이 지금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면,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꽉 안아줄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는 햇빛이 괜찮은 거지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작은 두 주먹으로 턱을 받친 뒤 말했다. "가."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잘 들어." 그녀가 힘들게 화를 억누르며 느릿느릿 차분하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화를 내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비키니 입은 여자를 보고 들뜬 거라면, 6 페니짜리 버스를 타고 리도로 가보지 그래? 이렇게 옥상까지 힘들게 올라오지 않아도, 거기에는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수십 명이나 있어." 그녀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속이 상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난 당신이 좋아요. 계속 지켜봤는데………….” "고마워."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고개를 다시 눕히며 그를 외면했다. 그녀는 누워 있고 그는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몇분 동안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내가 계속 있으면 저 여자도 결국 뭔가 말을 해야 할 거야.'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등과 허벅지와 팔에 힘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기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열기 속에서 태양이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일하던 옥상도 바라보았다. |
지켜본것으로 서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성은 바보가 되어 갑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범죄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 때의 시대는 그런것이 많은 범죄의 한 부분으로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19호실로 가다" 는 여자의 일생에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누리게 되면서 공허함을 이야기 합니다. 어머니가 쉴수 있는 공간을 집에 마련해 주지만, 여자는 침침하고 더러운 모텔의 19호실이 마음에 갑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시간을 있는것이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100파운드의 돈이면 자유를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부인이 몇시간씩 사라진을 불륜으로 생각하고 탐정을 구해서 확인 합니다. 그리고 너의 남친과 나의 여친이 만나서 쌍쌍으로 만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의심을 하면서 본인 또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던 거죠. 여성은 그러겠다 하고 19실로 갑니다.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거리 저편의 쓰러져가는 건물들, 축축하고 우중충하지만 가끔 파랗게 개기도 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이나 하늘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텅 빈 상태로 다시 의자에 앉았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방의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퀴퀴한 냄새, 땀과 섹스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성, 자유, 그리고 불안 |
죽음을 암시하면서 그녀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텔은 낮시간 이용을 하면서 끝나는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 시간이 다가오면서 여성은 한번도 누워 보지 않은 침대에 누워 봅니다. 왠지 처량하게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 시대의 상황이 여성들에게는 참아야 할 부분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김치 싸대기? 아니면 법적으로 위자료를 청구하고 재판으로 넘어가게 되겠지요. 그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파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요?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
-이런 극적인 일이 자신의 상상과 달리 전혀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굴욕감을 느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어쩌면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일을 겪었을 것 같았다.
작가가 꿈이었으나 라디오나 서평을 쓰는 쪽으로 진출한 그레이엄은 사교 모임에서 무대 미술가 바버라를 성적 대상으로 지목한다.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30분가량 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오자 그레이엄은 그녀와 동침을 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그는 바버라의 집에서 성폭행을 시도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저항하는듯했으나 그에게 패배감을 안겨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종 후보 명단의 천 명 중 한 명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며 만족해한다. 바버라의 대응은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의 상황에서는 무리수를 두는 처사일 수도 있기에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더군다나 그레이엄의 어처구니없는 행각은 독자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들기도 하고 혐오감을 유발하기도 하며 비참하리 만큼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도리스 레싱이 의도한 것은 남녀 관계의 성문제와 일에 대한 기존 관념들의 시각뿐만은 아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레이엄이 서술한 결혼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의 경우 사랑을 운운하기보단 의리나 동지애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결혼 생활도 가정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탈이라는 극적인 순간도 결코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성공한 여자를 성적으로 정복하려는 그릇된 행위로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일과 일탈이 주는 굴욕감을 보상받으려 한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두어 번 읽다 보니 바버라의 노련미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그레이엄의 끝까지 지질한 모습은 그 어떤 마침표보다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옥상 위의 여자
-톰은 여자가 아까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보고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다..... 중략..... 톰은 기뻤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을 때면, 그녀가 더욱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았다.
때는 유월, 장소는 옥상 위. 지붕 작업을 하려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굴뚝 옆 응달에 몸을 식히려던 세 남자는 굴뚝 사이로 갈색 담요 위의 태닝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마흔 다섯즈음 보이는 해리, 석 달쯤 전 결혼한 스탠리 그리고 열일곱 살 톰은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그녀의 시선을 끌어보지만 개의치 않는 여자의 모습에 분노한다. 이 작품은 그 어떤 인물보다 톰의 심리 묘사가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리와 스탠리를 따돌리고 톰은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가 그에게 남긴 것은 증오심이었다. 톰이 그녀를 엿보며 상상해 온 둘만의 유대감, 다정함 등은 한낱 꿈,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그들이 뜨거워진 지붕 연판에 물을 뿌려 더위를 식혀보려 했지만 이내 김으로 증발해버렸던 물처럼. 그들은 그녀를 '레이디 고디바'로 칭한다. 레이디 고디바는 영국 코벤트리 지방에서 전해지는 '고디바 부인'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 전설은 대략 이렇다. 11세기경 영국 코벤트리의 영주가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레오프릭의 아내 레이디 고디바가 남편에게 세금정책을 개선해 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레오프릭은 그녀의 간청을 쉽게 수락하지 않았는데, 대신 농민에 대한 진실된 사랑의 징표로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면 고려해 보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아무도 훔쳐보지 않기로 했는데 호기심 많은 톰이 커튼을 슬쩍 들추어 레이디 고디바를 훔쳐보게 되었다. 톰은 그 순간 장님이 되었고 레오프릭은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코벤트리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엿보는 호색한을 가리켜 영국에서 'Peeping Tom(엿보는 톰)'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의 유래가 바로 '고디바 부인'의 전설에서 비롯한 것이며 현재는 관음증 환자나 관음증 자체를 가리키는 명사로 쓰인다. 도리스 레싱이 이 작품에서 그녀를 고디바로, 세 남자 중 한 명을 톰으로 설정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쨌든 옥상 위의 세 남자와 여자 모두 이해하기 힘든 인물인 건 사실이다.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사람들은 옆구리에 불타는 창 같은 것을 하나 꽂은 채 돌아다니며 그것을 뽑아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상처처럼 고통스러운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
옛사랑 A와 B. 그들과 이별 후 이번엔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하며 C를 만날 계획을 세운다. 그녀는 A와 B에게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C와의 만남도 두려워하는 눈치다. 온전한 사랑의 형태는 동그라미인 것일까? 나는 그녀의 고뇌 속에서 셀 실버스타인의 작품 동그라미 시리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나간 동그라미의 조각을 찾아다니는 행위 그것은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라 하겠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실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내면의 그녀에게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사랑의 끝은 결국엔 쓰라린 고통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자문을 수없이 해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이 단편은 누군가에겐 아련한 기억 속의 오마주일 것이다. 위안이 되어주는 것 같다가도 철저하게 봉인된 상자를 여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의 사랑이 상처로 남아있지만 지워버리기엔 너무 소중해 가끔 몰래 꺼내어 보고 금세 숨겨버리는 아픔을 간직한, 그녀처럼 심장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어느 길 위에, 어느 카페 안에, 어느 마을에 가득할 것이다. 심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해방과 자유가 아닌 또 다른 구속일지도 모르겠다. 도리스 레싱은 이 단편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반드시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단편을 그녀의 최애 작으로 꼽고 싶다.
*한 남자와 두 여자
-도로시가 갑자기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작고 반항적인 그녀의 하얀 등과 담요로 꽁꽁 감싼 그녀의 아들이 대조를 이루었다.
예술가인 두 쌍의 부부 도로시와 잭, 스텔라와 필립이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낸다. 도로시와 잭은 여름을 에섹스에 있는 오두막에서 지내고자 하고, 필립이 출장을 간 사이 스텔라는 그들을 만나러 간다. 도로시는 생후 6주가 된 아이가 있다. 그녀는 히스테릭한 언행을 보이며 잭과 스텔라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 도로시는 산후 우울증이다. 출산 임박 석 달 동안 그녀는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출산 후에는 자신 안에 창의성이 모두 죽어버렸다고 하소연을 한다. 결혼과 임신이 시간을 두고 일어나고 마침내 출산을 하게 되면 '아기'의 탄생이란 기쁨과 환희를 느끼지만 '나'라는 정체성 또한 잃어버리는 듯한 감정이 생기는데 그것이 산후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로시의 제안은 일종의 투정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한 남자와 두 여자>는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기보다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듯한 느낌이 내내 들었던 작품이다. 억지로 감정을 쥐어짜내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지도 않으며 극도로 절제하고 있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심리묘사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방
-나는 항상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긴 여행에 대한 흥미를 안고 오후에 꿈나라로 향한다. 그렇게 선잠이 들어서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곳으로 이끌려 간다.
상자 같은 작은방 네 개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을 여기저기 손본다. 그녀는 밤보다 낮에 자는 것을 더 흥미롭게 생각한다. 어느 날 오후 전쟁 중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된 꿈을 꾼다. 그 이후로 그 꿈속의 방으로 돌아가 보고 싶어 한다. 이 단편은 매우 짧지만 임팩트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세상은 시간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오랜 친구만큼이나 친숙하다고 한다. 칼 융은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두 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개인의 상징성이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주인공이 꿈속에서 만난 아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 겪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상실한 끔찍한 기억이 무의식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정신 속에 여러 개의 무의식이라는 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 대 영국
-노동계층과 중하층 가정 출신으로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특히 취약하다. 그들에게 학위는 몹시 중요하다. 또한 그들은 낯선 중산층 관습에 적응하느라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기준의 충돌과 문화적 충돌의 희생자이며, 자신의 출신 계급과 새로운 환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영국 대 영국>은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몇 년 전 보았던 뮤지컬 빌리 엘리엇이 오버랩 되었다. 작가가 쓴 서문에 따르면 돈커스터 근처의 광산촌에서 광부 가족의 집에 일주일 동안 머무른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빌리 엘리엇은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를 중심으로 탄광촌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성장해 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 직업을 대물림해야 하는 노동계층의 숙명.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응원한다. <영국 대 영국>에서도 찰리의 가족들 모습에서 그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다만 빌리에 비해 찰리는 온 가족이 찰리의 대학 공부를 위해 헌신하지만 찰리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정신착란에 빠져있는 인물이다. 찰리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의 어깨에 커다란 짐 꾸러미가 올라가 있는 듯 느껴져 읽는 내내 씁쓸함을 떨쳐낼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두 도공
-꿈속에서 내가 그 마을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깨어난 뒤에는 안 될 것도 없죠. 그래요, 토끼가 노인의 손에서 흙바닥으로 깡충 뛰어내렸습니다...... 중략...... 노인은 너무 행복해서 울었죠...... 중략...... 게다가 그 가엾은 노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토끼 한 마리쯤 누릴 자격이 있어요.
<두 도공>의 화자인 '나'는 런던 외곽의 마을에서 교사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메리라는 도공을 안다. 그리고 어느 날 꿈속에서 빨간 흙으로 뒤덮인 황무지로 둘러싸인 마을 공터에서 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빚고 있는 늙은 도공을 보게 되고 메리에게 꿈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낸다. 늙은 도공은 계속 화자의 꿈속에 나오게 되고 처음 크게 반응이 없었던 메리는 점점 화자의 꿈속 늙은 도공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언젠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두 도공>이 상징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작가의 의도 측면에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메리가 현실에서 진흙으로 빚은 토끼를 화자가 받아 꿈속에서 노인에게 건네고 노인이 물을 뿌려 내려놓자 토끼(짐승)이 훌쩍 뛰어내려 정착지에 도달하는 장면은 현실 속 메리와 꿈속 노인, 즉 두 도공이 봉착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인 것 같았다. '토끼'는 그들의 문제를 와해시키는 매개체인 것이다. 화자의 꿈과 메리의 현실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대판 마술적 사실주의의 면모가 돋보인 이 작품 역시 도리스 레싱의 훌륭한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와 남자 사이
-남자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왜 여자라는 성을 잃어버리는지는 하느님만 아실 거예요...... 중략...... 잭은 그 빨간 머리 여자의 영리한 머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정치에 대해 똑똑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그 여자가 칼럼을 중단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죠.
톰의 정부였던 모린이 톰의 부인이 된 여배우 페기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 여자는 으레 여성으로써의 면모를 잃게 마련이라는 전제하에 모린은 페기의 망가진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페기는 이미 톰과 헤어진 뒤였고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모린과 페기는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서로가 동병상련의 처지임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도모한다. <남자와 남자 사이>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가도 공감되기도 하고 이따금씩 폭소를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웃으면서 읽기엔 두 여자의 대화는 매우 진지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이었을까?
*목격자
-그런 멍청한 여자애한테는 딱이에요. 그 애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결혼밖에 없잖아요. 그런 애들이 생각하는 건 결혼뿐이죠. 그 애도 이제 남자에 대해 알게 될 거예요.
50이 넘도록 연애도 한 번 못해보고 경리사원 브룩 씨는 정년퇴직 연령이 되었다. 저축한 돈으로는 살기가 힘들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앞에 새로 들어온 여자 경리 직원 마니가 나타난다. 그녀는 사장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데다 실무 능력도 형편이 없어서 직원들에게 미움을 사는데... 마니와 잘 엮여보려다 사장과 마니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 알아차린 브룩 씨. 마치 블랙코미디를 한 편 보는 듯한 느낌이다. 브룩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난달에도, 그전 달에도 주위에서 익히 봐온, 연예 기사에서도 흔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20년
-선명하고 차가운 분노가 전기처럼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방금 결단을 내린 사람답게 힘찬 발걸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향해 걸어갔다.
20년 전 엇갈린 약속으로 인해 헤어졌던 두 남녀가 칵테일파티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익숙한 소재지만 도리스 레싱은 원망이라는 감정을 두 사람의 짧은 만남에 짙게 담아낸다. 과거 한 번의 엇갈림으로 20년을 넘게 안 본 연인 사이라면 정녕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분명 만나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큰 믿음과 사랑은 없었을듯하다. 나라면 그냥 모른척했을 듯.
*19호실로 가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 제목으로 쓰였을 정도니 단연 최고로 뽑을 만한 이야기다. 주인공 수전의 상황만 보아도 기혼층의 독자가 훨씬 더 많이 공감하지 싶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적이고 행복한 일이라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날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주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남편이 입던 목 늘어난 티셔츠에 무릎이 나온 쫄바지 차림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마주하게 될 때,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건 사실이다. 수전의 19호실을 통해 도리스 레싱이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지만 수전이 꼭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이 '엄마'라는 광고를 보고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언제부턴가 헌신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엄마라는 존재, 그리고 부부라는 관계와 육아라는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노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작년까지 버지니아 울프에 심취하여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섭렵하면서 오랜 기간 헤어나질 못했는데 재독하는 내내 울프가 오버랩되어 힘겨웠던 작품이다.
도리스 레싱 저/김승욱 역 19호실로 가다 리뷰입니다.
읽을 때도 많은 생각과 기분이 들었던 책이라 리뷰 조차도 간결하게 정리해서 말하기가 어렵네요. 단편을 엮은 책이라 길지 않은 호흡으로 쭉 읽기 쉬운 내용이지만 막상 한편을 다 읽고나면 왠지 긴 숨을 내뱉게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오래 전 작가의 작품이 아직도 내 마음을 읽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건 아직도 우리가 과거 속에 머무르고 있단 뜻이겠죠.
빅토리아풍의 집에 살며, 안정된 중산층 수입을 보장받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스런 아이들과 따뜻한 이웃과 함께 행복한 삶을 만끽하고 있는 해리엇과 데이빗 부부. 그러나 다섯째 아이인 벤의 탄생은 모성애와 책임감, 전통적인 가치를 믿어온 그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들이 계획했던 이상적인 삶의 행로를 모두 파괴하는 벤을 보면서 헤리엇은 다섯째 아이의 존재가 행복하게 살려는 자신들에 대한 신의 형벌일까 아니면 태고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주적 진화의 소산일까 자문하기 시작한다. |
사실 이 부분만 봤을 때는 <다섯째 아이>가 조금 더 철학적인 스릴러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재능으로 돈을 버는 사람 <p.25> |
그리고 또 하나 느낀 건, 세계 어느 나라나 정말 사는 모습은 비슷비슷 하다는 것. 남녀차별이나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문장들을 보면서 굉장한 기시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누이는 교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집안의 여윳돈은 모두 찰리에게 들어갔다. <p.262> 하루 저역 시내에 나가서 좀 즐겁게 놀아도 되잖아. 과자를 포장하는 노동을 하면서 어떻게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p.275> 이건 영국과 영국이 대립하고 있는 거야. 다들 공정한 규칙을 말하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가난한 놈들을 정해진 날짜에 목매달아 죽일 걸. <p.295> |
우리 서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의 상처를 핥아주는 일은 하지 말기로 해요. 자신의 심장은 그냥 자신이 갖고 있자고요. <p.149> 임신 중에 도로시는 부드럽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실 나는 아기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어쩌면 엄마가 되는 건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몰라. 어쩌면...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p.187> 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재미와 만족을 안겨줄 수는 있지만, 삶의 원천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p.465> 매슈와 아이들은 엄마가 해주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진지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눴다. 수전은 처음에 남편과 장남 해리가 나누는 대화를 언뜻 들었을 때,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 커다란 집에서 그녀가 자기만의 방을 하나 마련하는 일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이렇게 엄숙하게 토론해야 될 일인가? <p.502> |
**읽어보고 싶은 책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버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19세기 여성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 |
자주 시도했다가 또 금방 이전에 중단했던 지점에서 책장을 덮고야 마는 책이 있다. 아쉽지만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들이 이미 많기 때문에 적지 않은 책들이 그렇게 ‘최종후보 명단에서’ 빠지게 된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다시 읽게 되는 책들도 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내가 이 책을 한 문장 더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되었음을 느꼈다. 이런 성장의 느낌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만끽하며 한참이나 읽다가 이내 책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분명한 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의 말이 왜 전엔 이해되지 않았지? 즐거움이 의아함으로, 그것이 곧 부끄러움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