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이사를 하면서 서울을 가로지르는 버스 유랑을 하게 된 저자 1시간 반 이상 걸리는 하굣길 그 길 위에서의 시간들 때문에 (혹은 덕분에) 그 나이에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보다 조금 더 사색적이고 조금 더 감성적인 아이가 되어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을 조금 잃긴 했지만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읽고 보고 생각하는 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닥 저자는 어쩌면 자신의 로드무비는 그때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날마다 정처 없이 버스 유랑을 다니며 파노라마 처럼 혹은 영화 이미지처럼 이어지는 도시의 풍경들을 바라보던 그때 그리고 청년기에 낯선 이국에서 보낸 방랑의 시간과 그 후로도 이어진 유랑의 시간이 모두 한 편의 로드무비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가끔 삶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생의 모든순간들이 필름 위에 새겨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이름 모를 로드무비의 일부인 건 아닌지 의혹에 빠져들곤 한다고?
진짜 로드무비란 무엇일까? 이지 라이더 이후로 나를 매혹시킨 로드무비들은 유명 관광지를 순례하는 트립 무비나 자아의 성장과정을 그린 교양 영화가 아니라 진짜 로드무비들이었다 그러니까 길 위의 영화들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나는 영화 사람의 마을에서 시작해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며 아 잘 다녀왔네 라고 흡족해하지 않는 영화 떠남이 곧 유랑이고 방황임을 보여주는 영화
저자는 천국보다 낯선에서 낡았지만 몸에 꼭 맞는 외투처럼 따라다니던 이십대의 가난과 고독을 백색도시에서 왠지 리스본에서는 가능할 것 같은 삶의 가능성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는 삼십대의 마지막 여름을 견디게 해주었던 음악과 가난하지만 담백한 삶 그리고 낯설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젊은 고다르의 심장과도 같은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에서는 생계를 위해서 프랑스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마주했던 소멸해가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서는 보헤미안 적 삶과 로큰롤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한다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아무튼 시리즈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시인 활동가 목수 약사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개성 넘치는 글을써온 이들이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각권의 책에 담아냈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교집합을 두고 피트니스부터 서재 망원동 쇼핑 게스트하우스 계속 스릴러 스웨터 외국어 같은 다양한 주제를 솜씨 좋게 빚어 한 권에 담아 드는 주제를 골라 읽는 재미를 더했다 길지 않은 분량에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져 부담 없이 그 세계를 동행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이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하나의 시리즈를 만드는 최초의 실험이자 유쾌한 협업이다 색깔 있는 출판사 개성 있는 저자 매력적인 주제가 어우러져 에세이의 지평을 넓히고 독자에게 쉼과도 같은 책 읽기를 선사할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에서 '로드무비' 편이다. 작가는 영화 관련 전문가로 보인다. 어려서 로드무비를 즐겨 보다가 영화 쪽으로 흘러간 인생쯤 되는 것일까. 로드무비에 대해 이만큼이나 들려 줄 이야기를 갖고 계신다니 경험 없는 독자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길을 따라 가는 영화. 영화를 아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길'은 아주 좋아하는 말이고, '길'을 담은 것이라면 영화든 책이든 찾아서 보려고 한다. 나는 나의 이 속성을 유목민의 적성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상당히 게으른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몸은 못 따라가고 마음만 하염없이 떠돌게 하는 셈이니까.
작가가 로드무비에 빠져 드는 계기를 들려 주는 내용은 흥미롭다. 어려서 긴 거리의 학교를 통학하며 발견한 적성이라니. 그렇게 해서 서울을 몸으로 알게 된 과정도 대단해 보이고. 환경 탓은 약한 사람들이 하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로 보이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환경의 조건을 내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힘, 잘 키우면 삶의 길로 바뀌기도 하는 것일 테니까.
작가가 예시로 들고 있는 영화들, 아쉽게도 내가 본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런 영화를 보는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나는 로드무비에는 흥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람은 등장하지 않고 길을 따라 가는 카메라의 시선만 담긴 여행 프로그램을 종종 보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는 진정한 방랑자의 자질은 없나 보다.
차를 끌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내 친구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이다.
동생 내외와 조카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 주 월요일에 돌아온다고 했다. 다음 달 초인 9월 2일 아내가 일본으로 4박 5일 일정의 출장을 떠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고양이 용이의 투약에 대해 걱정하였다. 우리는 십육 개월에 걸쳐 팀 워크를 갈고 닦아 왔고, 그 매카니즘 안에서만 고양이 용이를 보살폈다. 9월 5일에는 매일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카페 크문을 운영하는 두 명의 사장이 일본으로 떠난다. 열흘 동안의 휴가를 그곳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 가끔 삶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내 생의 모든 순간들이 필름 위에 새겨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이름 모를 로드무비의 일부인 건 아닌지, 의혹에 빠져들곤 한다.” (p.16)
1988년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번째 만취를 경험했다.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양쪽 어깨를 걸고 있던 두 명의 선배가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내 발 아래로 지나가던 아스팔트, 횡단보도 혹은 차선에 도포된 흰색 선이 휙휙 내 눈 아래로 지나가는 것은
기억난다. 많은 로드 무비의 클리셰라고 할법한 장면이었다. 선배네 집에서 잠깬 다음 날, 선배의 어머니가 널부러져 있는 우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배에게 던졌던 일갈도 기억난다. 이놈아 빤스는 갈아입고 다니는 거냐. 나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그저 숨죽이고만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행이란 깨달음의 도정(道程)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을 통한 자아 성장이나 세상의
발견 같은 건, 개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여행을 가서 자아를 성장시키고 세상을 발견할 인간들은 떠나지 않고 살던 데에 계속 살아도 잘
성장하고 잘 발견할 이들이라는 것을.” (p.27)
젊은 시절 많은 시간 길 위에 있었다. 봄에 집을 나왔다가 여름에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영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찾아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당시 86학번의 선배 누나가 어머니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그 선배를 잊지 않고
내게 근황을 묻고는 하였다. 누나는 이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그 누나에 대해 묻지 않는다.
『... 그리고 리스본을 떠나는 기차역에서 그는 주변 사람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 자기 자신에게 혹은 그녀에게 이렇게 적는다.
“나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 로사는 떠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유일한 나라는 바다야.”』
(p.70, 알렝 타네의 영화 <백색 도시>의 대사 중)
책에는 많은 로드 무비들이 등장한다. 데니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1969), 빔 밴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를 비롯한 영화들,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1984), 알렝 타네 감독의 <백색 도시>(1983), 미국의 로드 무비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 <올리브나무 사이로>(1994)와 같은 길 위의 영화들이 나온다.
“길이 있기에 삶이 이어진다. 길은 동네와 동네, 장소와 장소를 이어주지만, 과거와 현재도 이어준다. 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떠올릴 수 있고, 과거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길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줄 뿐 아니라 시간과 시간도 이어준다. 시간은 늘
공간을 파괴하고 공간에 새겨진 기억 또한 앗아가버리지만, (길을 포함한) 공간은 시간을 이어주고 종종 그 기억도 되살아나게 해준다.”
(p.137)
생각해보니 길 위에서 지체하는 시간을 가져본지 오래되었다. 바쁘다는 말만으로는, 내게는 돌봐야 할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합리화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어머니는 나를 한량이라고 불렀고 나는 충분히 정지해 있은 다음에 움직이면서 살았던 적이 있다. 이제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그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지체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정체되고 있다니 아이러니인데, 그게 또 삶이려니 한다.
김호영 / 아무튼, 로드무비 / 위고 / 143쪽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