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2일
[이주의 신간]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 『매거진 B : THE HOME 더 홈』 외
2020년 10월 14일
가까운 길도 빙 돌아가거나 길을 찾는 데 꽤 많은 시간과 체력을 낭비할 정도로 방향에 약하다. 삶의 방향도 마찬가지.
그럴 때마다 내비게이션이 되어준 건 영화였다. 회사를 그만둘 때, 베를린으로 떠날 때, 다시 돌아와 책방 문을 열 때도, 영화는 내게 인생에 여러 갈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그 길엔 아스팔트 대신 자갈밭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건 나처럼 평범하고 지질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 덕분이었다.
책 날개에 적힌 글을 읽으며 누군가에게는 영화가 내비게이션이 되어줄 수도 있구나..생각하다가 내게 책 속의 글들이,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가 종종 멈칫거리는 내게 방향을 알려주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당장 내비게이션이 내게 알려주는 방향이 그리 결정적이라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는 단지 내가 걷는 방향을 1도 정도 틀어주는 것일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1도가 시간이 지나 크게 벌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내게 영향을 미치는 작은 것들이 만드는 나비효과가 새삼 대단하다 싶다.
영화책방을 운영하는 저자는 26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영화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적어내려간다(나는 이 중 9편의 영화를 봤다).
[1관] 울면서 다시 일어날 용기
걷기왕, 안경, 마녀 배달부 키키, 중쇄를 찍자!,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2관]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앙,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인사이드 아웃, 미니멀리즘
[3관] 인생에도 치트키가 있다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원펀맨, 레볼루셔너리 로드, 런치 박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4관] 거짓말쟁이의 해피엔딩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레이디 버드, 최악의 하루, 포레스트 검프, 우리도 사랑일까, 원더풀 라이프
[5관] 열심만으로는 안 되는 일
벌새, 태풍이 지나가고, 소공녀, 서칭 포 슈가맨, 찬실이는 복도 많지
*밑줄친 영화 9편이 내가 본 영화 들
저자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영화는 아, 이 이야기가 저자에게는 이렇게 다가갔구나,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영화에서는 저자의 이야기 위로 나의 시간이 겹쳐지기도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버려도 그 다음날이면 다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용기가 필요하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지금 네 모습으로도 되었다 위로를 받고 싶기도, 또 가끔은 내 인생에도 치트키 하나쯤은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우리 지현이는 꿈이 뭘까?”
“공무원이요.”
“아니~공무원 그런 거 말고. 진짜 꿈! 엄청 막...... 그런 거 있잖아!”
(중략)
“지현아, 안 돼. 벌써부터 적당히 하면. 지금 조금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
“뭘 자꾸 이겨내요! 그리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아야 돼요? 공무원도 존나 열심히 해야 되거든요! 이만복처럼 대회 나간다고 학교 땡땡이 치고 그런 것만 열정이고 꿈이예요?” pp.24-25
‘걷기왕’을 보지는 않았으나, 뭘 자꾸 이겨내라 하느냐,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으라고만 하느냐, 대체 왜 열정이며 꿈을 강요하느냐 항변하는 지현이의 외침에 ‘맞아, 맞아’ 격하게 공감이 가기도 하고,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p.69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영화 ‘앙’의 키키 키린의 대사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오늘 오후 기차를 탈 거예요. 어디서 읽었는데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두고 봐야죠.’ p.116
이 대사를 읽으며, 영화 ‘런치박스’를 꼭 봐야겠다 생각하기도 했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일상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떠올리는 저자의 글에, 나 역시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내 일상의 평온함을 위해 애써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함께 울컥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평범했던 일상을 빼앗긴 요즘, 나는 종종 지난 일기를 들여다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료하기 짝이 없던 날들도 기록을. 그리고 재난의 한가운데에서도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구석구석 소독을 마치고 카페 문을 여는 친구의 얼굴을, 줄지어 선 사람들의 원성을 들으며 마스크를 판매하는 약사의 바쁜 손을, 책방문을 살짝 연 채로 박스만 놓아두고 가는 택배기사의 뒤통수를, 고요하고 예민한 출근길을 책임지는 버스 운전기사의 눈을 떠올리며, 나는 자주 울컥한다. p.124
저자가 소개한 스물여섯편의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으나, 어딘가 그 느낌이 닮아 있다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저자의 취향이 반영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경보에 도전하는 소녀의 것이든(걷기왕),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꼬마 마녀의 것이든(마녀 배달부 키키) 또는 ‘라이프’잡지사에 16년째 근무중인 월터의 것이든(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결국 그들 모두 저마다의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한발씩 내딛는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의 터널 속에서 책방 문을 열고 글을 쓰며 일상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도망갈 수도, 멈춰 있을 수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서. p.125
책의 말미, 저자는 자신과 애인을 비교해 글을 적어 놓았다. 얼핏 보면 참 다른 사람들이구나 싶지만 이내 정답이 없는 삶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장편영화를 찍고 있구나..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일지, 나만의 장편영화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미화에게 꿈은 연필로 쓰는 것이다 언제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것. 나는 지울 수 있을 때에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때에만 용기가 생기는 사람이니까. 반면 안다훈에게 꿈은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것일 테다. 시간이 지나면 잉크는 빛바래 지워질 수 있지만 자국은 남아 사라지지 않는 것. p.196
*나에게 적용하기
책 속에서 만난 영화 보기(적용기한 : 한 달에 한편)
*보고싶은 영화 : ‘런치박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다시 보고 싶은 영화 : 포레스트 검프
*기억에 남는 문장
나는 길을 잘 잃는다..(중략)..특히 방향에 약한 편인데, 동쪽이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방향이라고 아무리 말해 줘도 내 몸을 빙글빙글 돌리면 어디든 오른쪽이 되어버리는 걸? p.29
내게 쓰는 일이란, 돈이 되진 않지만 거친 물살에도 무너지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둑을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p.39
어쩌면 나도 누마타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필사적이지도 않으면서, 된통 깨질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그저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누마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넓혀나가는 동료 작가들을 시기하면서 언젠가 내 글을 알아봐 줄 편집자가 나타나겠지, 언젠가 유명해지겠지, 그저 오지 않을 언젠가를 기다리며, 언젠가 언젠가만 되뇌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p.47
*중쇄를 찍자!
얘는 안오면 서운할 것 같고. 얘랑은 연락이 뜸해졌는데...... 그래도 오겠지
메신저의 친구목록을 훑으며, 내 부고가 전해질지도 모를 이름들 앞에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p.51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나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오지 탐험가나 모험가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인생에서 맞닥뜨릴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누군가의 허락은 불필요하다는 것과 조금 무모해져도 별문제가 없다는 것. 그러니 시도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p.54
어쩌면 소유욕이란 더 많이 먹을수록 배가 고픈 감정일지도 몰랐다. p.86
일상이란 예측이 가능한, 그래서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자신만의 매뉴얼이 늘어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므로 일상에서의 탈출이란 위기 속으로 나를 몰아 넣는 일, 패턴이 없는 상황 속에 나를 던져 넣는 일이라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p.109
‘행복 같은 거, 여기에도 없다면 거기에도 없다’는 비관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든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p.111
*레볼루셔너리 로드
“검프가 본인 의지대로 달리기를 멈춘 건, 그 장면밖에 없어.”
검프가 3년 2개월하고 14일, 16시간을 달렸음에도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했던 그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었다고, 그 애는 덧붙였다. 어떤 일을 얼마나 어떻게 해왔든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다는 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pp.151-152
*포레스트 검프
지금 내게는 함께 있으면 근육이 이완되는 오래된 애인이 있다. 애인은 내 맥박을 뛰게 하진 않지만, 내 발모양에 딱 맞게 닳아버린 운동화를 신고 걷는 편안함을 준다. 익숙해진다는 건 옆사람의 숨소리를 시계 초침처럼 들으며 잠에 드는 것, 한밤중에 옆자리를 더듬어 안정감을 되찾는 것, 2인분의 밥을 짓는 것, 눈에 띄게 치약이 빨리 줄어드는 것, 이 모든 과정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p.158
사람이 죽고 난 후 잠시 머무는 생 너머의 공간, 림보. 림보에서 사람들은 살아생전 가장 행복했고 소중했던 순간을 선택한다. 그렇게 선택된 순간은 림보의 스태프들에 의해 영상으로 재현되고, 영상을 보고 난 후에야 그 기억을 안고 영원으로 떠날 수 있다. p.181
*원더풀 라이프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처에는 패턴이 없어서 매번 다른 길로 흉이 졌다. p.189
물론 언제고 <벌새>와 같은 영화를 본다면 유년의 기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마음에 박혀 기어코 또 눈물을 뽑아내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부모를 미워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나도, 부모도 그 시기를 무사히 통과했으니까. 그 다리를 어떻게든 무사히 건너왔으니까. p.172
로드리게즈는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당연히 실패할 수 있다고. 그러니 하루아침에 아티스트에서 육체노동자 신세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다음 삶을 다시 살아가야 한다고. 뮤지션으로서의 삶은 끝났을지 몰라도 뮤지션이 아닌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p.190
*서칭 포 슈가맨
삶을 나만의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집이다. 한계에 이르러 '조금만 더' 하고 다그치는 일도 없어 보인다. 얼핏 보기에 무얼 꼭 이루어야겠다는 열정과 간절함이 없는 것 같다. 참견도 조언도 섣부른 위로도 없이 서툴고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섬세하게 고른 영화 이야기를 곁드려서... 그러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저자는 27편의 인생 영화와 자신의 이야기를 무심한 듯 연결해 나간다. 자신의 인생의 돌아보면 터닝포인트마다 빙 돌아가는 느린 길을 택해 천천히 걸어온 것 같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영화 <걷기왕>의 만복이처럼 무리하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오래오래 나약한 채로 걷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독자들도 적당한 답변을 둘러대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 책 속에는 저자의 마음에 든 영화 속 등장인물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영화 대사가 담겨 있다. 당연히 저자를 닮은 주인공의 모습과 자신의 취향을 대변하는 대사이다. 그녀가 고른 영화들은 특징이 있다. 박력있는 목표지향적 영화는 아니다. 보통 영화에서는 절대 메인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 등장하는 스파이 스즈메처럼 그녀는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처럼 느껴질 때, 나의 평범함이 지겨울 때, 보통명사로서의 삶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지금 평범하게 사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나는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다’라고 주문을 왼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란 쓸모있는 무엇이 꼭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는 그냥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라고 저자는 영화 <앙>에 나오는 도쿠에 할머니의 대사를 인용한다. 장자의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이 떠오른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의 매 순간이 사랑과 열정으로 충만한 뜨거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가 사실이 아닐까?
저자는 왜 인생 이야기를 영화와 연결시켜 풀어나갔을까?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근본 이유였겠지만, 저자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런닝타임이 있어 일정시간이 지나면 결말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작은 결정을 하든 그 결과는 런닝타임이 끝나는 언젠가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수 없이 정답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산다면 삶 속에 영화같은 장면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