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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 사우 | 2020년 10월 29일 한줄평 총점 0.0 (3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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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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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세종이 천문과학을 발달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은 어떻게 세계 최고 과학 국가가 되었을까?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연 세종과 천문학자들 이야기


세종이 이룬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꼽는다면, 훈민정음 창제와 간의대 사업이다. 간의대는 세종 대에 이룩된 과학기술의 핵심이자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였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간의대를 비롯해 세종 대 과학기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저자에게 많은 이들이 묻는다. “세종은 왜 천문과학을 발전시켰나요?” “간의대 건설이 위대한 업적이라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세종이 그토록 아끼던 과학자 장영실은 왜 갑자기 사라졌나요?”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무수하게 들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한 것이다. 오랫동안 전통과학을 전공한 저자는 세종 대 과학 부흥의 태동부터 전개 과정, 성과를 자세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독자는 천문에 대한 세종의 생각과 과학자들의 숨은 노력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과학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서술한 점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1. 조선 건국과 천문도의 비밀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
민심이 두려운 조선 건국세력
고구려 천문도는 ‘우연히’ 발견된 것일까
류방택, 이성계가 삼고초려한 고려의 천문 전문가

2. 천문도를 돌에 새기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탄생
석각 천문도의 600년 수난사
고구려 천문도가 아닌 고려 천문도였다?
동양 별자리 3원 28수
서양 별자리 황도 12궁
왕은 왜 천문도를 원했을까
별자리와 천문도는 언제부터 만들었을까

3. 태양은 제왕의 상징
태양이 사라졌다, 태양을 구하라
일식과 월식은 초미의 관심사
임금이 덕을 쌓으면 일식을 막을 수 있다
낮에 금성이 보이면 위험하다
금성, 연산군도 벌벌 떨게 한 별
혜성을 이용해 승리한 김유신 장군

4. 하늘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면 왕이 아니다
이방원에 대한 선입견
과감했지만, 하늘의 현상에 민감했던 태종
‘하늘의 뜻’을 의심한 세조
제후국 조선은 독자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5. 국가 통치와 시간
백성을 위한 시계를 만들다
종을 쳐서 시간도 알리고 새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도 알리고
인정과 파루,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다
광화문 종으로 관리들에게 조회 시간을 알리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도성 밖에까지 들리지 않는 게 문제
통금시간에 붙잡히면 ‘경을 친다’
종루의 우여곡절
낮에는 진각법, 밤에는 경점법
왕은 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려고 했을까

2부 : 세종과 천문 프로젝트

6. 조선의 하늘을 원한 세종
첨성대를 설치하다
잠들지 못하는 천문관들
북극고도를 직접 관측하다
한라산에서 노인성을 관측하다

7. 왕립천문대의 건설
조선의 하늘과 명의 하늘은 다르다
조선의 천문대를 만들자
7년 프로젝트의 완성
세종은 왜 간의대를 옮겼을까
그리니치 천문대보다 먼저 지어진 간의대

8. 원나라 천문학을 배우다
세조 쿠빌라이와 유병충
곽수경이 만든 사천대
우수한 원나라 수시력
“세종 대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

9. 세종, 달력을 통일하다
달력마다 길흉일이 달라 10년 동안 장례를 못 치르니
조선의 자주적인 역법을 완성하다
시간은 정치적 권위의 상징
농경시대 달력은 요긴한 생활의 지침서

3부 : 세종 시대 천문가들

10. 하늘이 내린 천문 장인, 장영실
세종을 위해 태어난 인물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
명나라로 파견된 장영실
출생의 비밀
장영실은 왜 관노가 되었을까
노비 영실을 상의원별좌에 앉히다
왕의 가마인 안여가 부서진 사건
안여는 장영실의 작품이다
장영실을 내친 세종의 속내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한 몇 가지 해석

11. 갑옷 입은 과학자, 이천
무관으로 출세하다
조선의 인쇄술을 업그레이드한 주인공
조선 활자본의 백미 갑인자를 만들다
중국에도 없던 사륜차를 발명하다
장영실의 스승이자 후견인

12.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
조선의 시간을 찾아라
동시대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 칠정산 내외편 편찬
제가역상집과 천문류초 편찬
세종, 이순지를 놓아주지 않다
이순지의 제자, 김담
“역법에 정통한 김담의 뒤를 이을 자가 없습니다”

4부 : 더 편하고 정확한 시계를 찾아서

13. 자격루로 정확한 시간을 알게 되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
우리나라 물시계의 역사
장영실, 새로운 물시계를 고안하다
중국 기술보다 앞선 자격루
자격루의 놀라운 원리
자격루, 국가 통치의 기반
자격루의 변천

14. 천상의 물시계, 옥루
세종이 꿈꾼 나라
옥루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기울어진 그릇’에 담긴 의미
농사짓는 백성의 수고로움을 살필 수 있게 하라

15.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
하늘을 바라보는 가마솥 시계, 앙부일구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한양 대로변에 설치하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앙부일구
앙부일구의 구조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으로 시각을 새기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는 세종 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휴대용 앙부일구

16. 다양한 해시계
말 위에서 사용한 천평일구
수평 추를 이용한 해시계, 현주일구
자동으로 정남향을 맞추는 해시계, 정남일구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
해그림자를 이용한 규표
우리나라 해시계의 역사
해시계에서 기계시계로

저자 소개 (1명)

저 : 정성희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전통시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장서각 책임연구원과 대전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다년간 서양 천문학의 전래와 조선시대 우주관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나라 전통 달력을 최초로 소개하는 「달력-시간의 자취」 전시를 기획했으며 KBS 드라마 「장영실」과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자문한 바 있다. 저서로 『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왜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했을까』, 『한국사 101장면』 등...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전통시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장서각 책임연구원과 대전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다년간 서양 천문학의 전래와 조선시대 우주관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나라 전통 달력을 최초로 소개하는 「달력-시간의 자취」 전시를 기획했으며 KBS 드라마 「장영실」과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자문한 바 있다. 저서로 『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왜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했을까』, 『한국사 101장면』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며 경기도문화재위원으로 있다.

출판사 리뷰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조지프 니덤(과학사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세종은 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천문과학을 발달시켰을까?
조선은 어떻게 세계 최고 과학 국가가 되었을까?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연 세종과 천문학자들 이야기

세종의 두 가지 주요 업적: 훈민정음 창제와 간의대 건설

세종이 이룬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꼽는다면, 훈민정음 창제와 간의대 사업이다. 간의대는 세종 대에 이룩된 과학기술의 핵심이자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였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간의대를 비롯해 세종 대 과학기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저자에게 많은 이들이 묻는다. “세종은 왜 천문과학을 발전시켰나요?” “간의대 건설이 위대한 업적이라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세종이 그토록 아끼던 과학자 장영실은 왜 갑자기 사라졌나요?”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무수하게 들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한 것이다.
오랫동안 전통과학을 전공한 저자는 세종 대 과학 부흥의 태동부터 전개 과정, 성과를 자세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독자는 천문에 대한 세종의 생각과 과학자들의 숨은 노력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과학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서술한 점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하늘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면 왕이 아니다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군주들은 하늘의 현상을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읽었다. 특히 제왕의 정치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과 벌을 내린다고 이해했다. 하늘은 두려운 존재였다.
조선의 왕은 일식과 월식을 특히 두려워했다. 태양은 왕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혜성이 나타나거나 낮에 금성이 보이는 현상도 불길한 징조라고 받아들였다. 조선 2대 왕 태종은 정치에 걸림돌이 된다면 형제도 친인척도 살해할 정도로 냉정하고 과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하늘의 현상에 민감했다. 일식이나 기상 이변이 나타나면 두려워하며 근신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 세종도 하늘을 주의 깊게 살피고 공경했다. 하늘의 현상이 예사롭지 않으면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죄수를 파면하고 풍악 소리를 멈추게 했다. 연산군도 낮에 금성이 나타나자 벌벌 떨었다고 한다.
왕은 하늘의 현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천문 현상을 단서로 삼아 올바른 정치를 펼치는 것이 왕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왕들은 하늘의 지도인 천문도를 필요로 했다.

조선의 하늘과 명의 하늘은 다르다
조선의 하늘을 원한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이토록 하늘의 현상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독자적인 하늘과 시간을 갖고 있지 못했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하늘의 일은 천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고 천자만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과 명은 제후국과 천자국 관계였기에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을 관측해서 달력을 만들 수 없었다. 조선이 자주적인 역법을 갖는다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명 황제가 내려주는 달력이 조선에 도착해야만 그에 맞춰 날짜와 절기, 일출?일몰 시간을 백성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도인 연경과 한양이 서로 위도가 달라 절기와 시간이 다르다는 데 있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여러 불편한 일이 많이 생겼다. 특히나 농사를 짓는 데는 기후와 때를 잘 알아서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세종은 중국과 조선의 하늘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중국 제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맞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수행하고 싶었다. 하늘의 운행을 정확하게 읽어 백성들에게 정확한 때를 알려주고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천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중용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돈과 시간이 많은 드는 사업이었다. 심한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팍팍한 현실에서 당장에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지도 않는 일에 백성들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며 모두 만류했다. 하지만 천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오래 준비한 사업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제일 먼저 하늘을 정밀하게 관측하는 천문대인 간의대를 만들었다. 세종 대에 지어진 간의대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나 중국의 고관상대보다 건립 연대가 앞선 천문대였다. 규모 면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뒤이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 앙부일구, 태양과 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 천상의 물시계 옥루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는 7년 만에 종료되었다. 세종이 천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18년 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관측의기를 장비한 천문기상대를 소유했다.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이 책 2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조선의 시간을 찾아라!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반포한 달력을 받아서 사용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천체운동을 계산하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하들에게 명나라 대통력을 연구해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분석하고 소화하도록 했다. 또한 한양, 백두산, 강화도 마니산, 한라산 등 주요 지점에 달력 편찬을 책임진 관리들을 파견하여 북극고도를 측정했다.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은 명나라 역법의 오류를 바로잡아 《칠정산내편》을 편찬했다. 뒤이어 이슬람력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교정한 《칠정산외편》을 편찬했다. 마침내 조선은 자주적인 역법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하면서 조선의 역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독자적인 역 계산을 바탕으로 한 달력 제작이 힘들어지기도 했다. 선조는 조선에 온 명군이 명나라 허락 없이 조선이 달력을 만든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며 달력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때문에 자주적인 역법에 따른 달력 제작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자주적인 칠정산법은 효종 대에 시헌력으로 개력된 이후에역 계산에 계속 사용되었다.

장영실, 이천, 이순지, 김담
조선을 대표하는 천문가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데는 과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 대표 인물이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세종을 위해 하늘이 내린 과학 장인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보고는 노비 신분을 문제 삼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공을 세우자 벼슬도 내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매우 드문 경우였다. 세종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장영실과 세종의 만남부터 장영실의 뛰어난 활약상, 왕의 가마가 부서진 이후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한 해석까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세종은 또 이천, 이순지 김담 같은 과학 인재를 발굴하여 조선 과학의 부흥을 이루었다. 장영실보다 이천과 이순지가 남긴 업적을 더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천은 조선의 인쇄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선박 기술을 개량하기도 했다. 이순지는 후계자인 김담과 함께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 발달에 헌신한 과학자들의 열정적인 삶과 업적을 이 책 3부에서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종이책 회원 리뷰 (3건)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q*****2 | 2021.11.02

오백 년의 시간 동안 오로지 안 좋은 일만 발생했을 리 없건만 결과가 ‘망국’이라 그런지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라볼 때면 내 눈은 매서워지고는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을 필두로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우리의 사고에서 작용하는 남존여비 사상 등이 떠오르고, 성리학 일색의 풍토에서 천대받았던 많은 존재들이 그저 안쓰럽게 느껴지고는 한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 열린 사고가 존재했다는 기술을 접했을 때도 내 안의 조선 이미지가 뒤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내 그릇된 사고가 무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세종의 하늘’을 읽으며 내가 알던 조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 세종이 누군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창제한 것으로 도처에서 칭송받는 인물이자 광화문 한복판에서 여전히 우리를 굽어 살피는 존재다. 신분제가 확고했던 시절과 지금은 분명 다름에도, 현대인들조차도 이 인물을 ‘성군’으로 일컫는다. 어진 정치를 펼쳤으며 다방면에서 융성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런 세종이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한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시대가 조선인지라 다소 의외지 싶었고,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조선이 훨씬 깨인 그리고 역동적인 나라였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세종은 어디에 내놓아도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시대의 큰 틀을 가급적 벗어나지 않고 사고했다. 융성했다고는 하나 조선이 세워진 지 불과 20여 년이 흘렀을 따름이다. 여전히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알게 모르게 고려 복원을 꿈꾸는 세력도 존재했을 시기에 통치자로서 가장 필요했던 건 일종의 권위였다. 폭력으로 억누르는 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당대 지배층은 하늘을 통제하려 들었다. 하늘이 부여한 권력, 이는 오늘날에도 종종 통용되는 표현이다.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설명이 어려운 자연현상의 힘이 더더욱 막강했을 것이다. 혜성이, 별똥별 따위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동요했다. 이를 정확히 예측하고 미리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라면 존경받아 마땅했다. 언제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우리보다 큰 존재, 중국 대륙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시차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 대륙의 심기를 불편케 만들 소지가 있는 일이었음에도 세종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멀게는 아라비아의 역법을 받아들여 연구토록 했으니, 지체 높은(?) 문인들 중에도 어명을 받들어 연구에 나선 이들이 있었다. 천한, 그래서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내치지 아니한 그들이 후대에는 어떤 평을 받았을지가 궁금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장영실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천, 이순지, 김담 등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다. 특히 이천은 외숙 염흥방이 이인임과 더불어 부정축재에 앞장선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야 말았다. 출세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본인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과학적 재능을 지녀 세종의 총애를 얻었다. 그의 손을 거쳤을 수많은 활자본 대다수가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기록이 완벽하면 관심이 덜했을 수도 있는데,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이 인물이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궁금증이 일지 싶었다. 
시간 통제 또한 백성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했던 지배층의 의도가 적극 반영된 행위였으나 그 과정에서 탄생했을 자격루는 실로 놀라웠다. 백성에게 일일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관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매순간 긴장을 해도 실수는 하기 마련이었고, 시간을 알리는 업무는 모두가 멀리하는 격무 취급을 받았을 듯하다. 과연 조선 학자들이 운동에너지를 알았을까는 의문이나, 이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자격루는 실로 놀라웠다. 때 되면 알아서 울리는 시계라니, 왠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감탄사를 자아낼 것만 같았다. 
흔히들 영, 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꼽는다. 실학이 융성했으니 나쁘진 않았을 테지만 왜란과 호란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이후라 백성들의 삶은 퍽퍽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15세기야말로 천문학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을 들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좋은 흐름이 지속됐더라면 이 땅의 역사가 달리 쓰였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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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인재들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과학강국 조선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h*********g | 2021.04.09
<세종의 하늘> 완독.

다른 책을 읽느라 미처 다 읽지 못했던 <세종의 하늘>. 드디어 다 읽었다.

공교롭게도 어제 4월 8일이 세종대왕 517주기 (1450년 음 2월 17일 승하)를 맞는 날이었고 의미 있는 날에 이 책을 다 읽게 되어 사뭇 남다르다.

세종시대는 조선왕조가 신생 왕조의 틀에서 벗어나 많은 발전과 안정을 이루었던 시대였다. 물론 그 한계나 실책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전반적으로 조선의 기틀이 다져지고 또 발전과 안정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새 왕조의 안정을 위해 민생의 안정은 그 어느때보다 시급했고 이를 위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하기 위한 노력은 세종뿐만이 아니고 그 이전과 이후의 왕들에게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세종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더 구체적으로 농사직설이라는 농법의 제작과 보급, 천문 관측 기구와 각종 시계의 제작등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고 또 많은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특히 동양사회에서 천명을 받은 왕이 통치의 안정과 정당성 확보를 위해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고 세종은 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 관측 기구의 제작과 각종 시계의 제작에 적극적이었다. 더구나 시간, 날짜와 관련한 역법의 경우는 중국의 경우에 맞춘 것이다보니 우리의 것과 맞지 않아 일식이 일어났을 때 시간이 맞지 않아 예보관이 곤장을 맞는 일까지 벌어져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자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세종의 천문과 과학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천문관들에 대한 대우에서도 드러나는데 윤사웅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고 그는 세종의 의도대로 꾸준히 천문 연구와 관측에 힘써 3품 벼슬까지 받았고 또 세종으로부터 어사주를 받으며 격려를 받았다고 할 정도니 세종의 인재를 보는 안목과 활용이 천문 과학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이 시기에 활약했던 인물들 중에 이천, 장영실, 이순지, 김담 등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천은 북극고도에 대한 세종의 질문에 잘 대답하여 세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각종 천문 관측 기구의 제작과 연구에 참여했고 장영실은 두말할 필요없는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기술자였지만 세종대 후반에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아쉬움을 주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세종이 탈 어연을 부실 제작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했던 이로서 장을 맞고 쫓겨났다는 등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설들은 모두 설일 뿐 확실하지 않다고 밝혔다.

아무튼 세종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조선이 발전하고 안정되었던 시기였지만 특히 천문이 중심이 된 조선의 과학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만큼 세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그의 지원에 힘입은 많은 인재들의 활약으로 그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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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세종대 천문학을 밝힌 책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벤*****북 | 2020.12.29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의 말이다.(니덤은 미국의 천문학자 ‘루퍼스; Will Carl Rufus‘; 1876-1946’가 세계 학계에 소개한 석각 천문도; 태조가 명해 제작한 석각 천문도‘를 바탕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이 말은 찬사지만 아쉬움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 그리고 한국은 천문학 분야에서 정체되거나 15세기의 성과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의 지리적 안목도 가졌었다. 이 사실은 사라진 원본 대신 모사본이 일본 류코쿠 대학(龍谷大?)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증명하는 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후 조선은 16세기 초 훨씬 퇴보한 혼일역대강리지도라는 지도를 만들었다.

 

정성희의 ‘세종의 하늘’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을 다룬 책이다. 조선은 자신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구려 천문도를 이용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바로 그렇게 이성계가 4세기 무렵 고구려 평양에서 각석(刻石)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관서인 서운관 관원에게 명해 탄생한 천문도다.(지도가 땅의 모습을 ‘구현; 具顯‘한 것이라면 천문도는 하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태조본 석각 천문도에는 ‘입성; 立星’이란 별자리가 있고 태조본을 토대로 만든 숙종본 석각 천문도에는 ‘건성; 建星’이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같은 별자리이지만 고려 시대에는 왕건(王建)의 건 즉 세울 ‘건; 建‘을 피휘해 뜻이 같은 설 ’립; 立’자를 써서 별자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면 조선 건국세력은 고려 천문도를 고구려 천문도라 주장한 것이 된다.)

 

하늘의 형상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린 그림이란 뜻의 이 천문도는 1241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다음으로 오래된 유산이다.(차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적도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나눈 12구역을 말하고,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를 12구역으로 나누어 땅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을 말한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군주는 하늘의 천문 현상을 단서로 삼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의 현상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제왕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5 페이지) 세종도 임금이 덕을 닦으면 일어날 일, 월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경(詩經)’의 말을 믿었다.(54 페이지)

 

전통시대 사람들은 신하가 군주의 권능을 침해할 때 일식(日蝕/ 日食)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일식을 용이 태양을 삼키려는 것으로 이해해 용을 쫓아 태양을 구하는 구식례(救食禮)를 치렀다. 우리 조상들은 일식을 신하를 상징하는 달이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잠식하는 현상 또는 강한 음기가 쇠약한 양기를 압도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구식례는 퍼포먼스였다. 북을 치고 활을 쏘는 등 달을 향해 공격을 하고 제단에는 희생(犧牲; 종묘제사 등에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바쳤다.

 

반면 가뭄에 대해서는 일식과 달리 존귀한 양(陽)이 비천한 음(陰)을 소멸시킨 현상으로 생각하고 조용히 기우제를 올리며 비가 내리기를 수동적으로 요청하는 등 난리를 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종을 만들어 쳤다. 시간을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을 알리려는 데에 더 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면 28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가운데 인정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파루는 우리 고유의 것이다.(64 페이지) 조선시대에 시보(時報)는 민간에 대한 통치 수단이자 지배층의 시간 관리를 위한 방편이었다.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88 페이지) 고종 21년인 1884년부터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에 대포를 설치하여 종 대신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렸다. 1895년부터는 인정과 파루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신 오정과 자정에만 시간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조선과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에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관상수시(觀象授時)라 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 사돈인 심온을 제거하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힌 태종은 그래서인지 하늘의 재이(災異)에 민감했다. 재이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이르는 말로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을 지칭한다. 태종은 누구보다도 하늘이 재이를 내려 인간을 꾸짖는다는 천견(天譴) 사상을 굳게 믿은 왕이었다. 조선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킨 세종도 천견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세조는 왕이 근신한다고 해서 혜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천인감응론에 바탕을 둔 재이론이 점차 극복되어간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과학의 수용 등으로 자연관이 변화한 결과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하늘의 일은 천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천자만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관상수시는 사대의 예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제후국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갖는 것은 종주국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천문을 정사(政事)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들여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설치했다.(103 페이지) 그런데 세종은 비용을 많이 들여 백성들이 힘들게 지은 간의대를 헐고자 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반대가 극심하자 결국 중국 사신이 볼 수밖에 없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했다는 말을 했다.(103, 106, 108 페이지) 간의대는 세종의 의지대로 경복궁 북서쪽으로 이전되었다.(109 페이지)

 

세종이 만든 간의대는 중국 원나라 천문가인 곽수경이 1279년에 건립한 사천대(司天臺)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109 페이지) 곽수경의 업적 중 가장 찬란한 것은 수시력(授時曆)이란 역법을 만든 것이다.(114 페이지) 수시(授時)란 ‘서경(書經)’에 나오는 경수민시(敬授民時)에서 유래했다. 공경히 백성이 때를 잘 맞추도록 한다는 의미다.(115 페이지) 수시력의 완전정복은 조선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조선 세종 대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내편’으로 인해서다.(칠정산은 움직이는 7개의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일곱 개의 별이란 해와 달 + 목화토금수성이란 다섯 행성을 의미한다.)

 

이는 곽수경의 수시력 계산법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선 실정에 맞게 교정한 역법이다.(116 페이지) 건국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시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동지사행(冬至使行)은 명 황제가 반포해주는 달력을 받기 위해 연경(북경)에 가는 일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도 연경과 조선 한양은 위도가 달라 시간이 달랐다는 점이다.(광화문; 37도 34분 8초, 북경; 39도 56분) 세종은 백성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 임금이었다.

 

세종은 일식 시작 시각을 15분 어긋나게 예측한 이천봉(李天封)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물론 15분 오차는 이천봉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국과 시간이 다른 탓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현실에 맞는 천문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91, 92 페이지) 세종은 즉위 2년 후인 1420년에 경복궁에 내관상감을 설치하고 첨성대란 이름의 관측대를 세웠다. 우리 역사에서 천문 관측대는 고구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설치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시간, 인력, 경제적 부담 등 때문에 왕립 천문대 건립 염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세종은 이미 장영실 등의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천문대 건립 준비를 했다.(일행이 본 천문기기는 명나라 것이 아니었다. 1279년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천문기기였다.; 133 페이지) 세종의 천문 사업은 1432년(세종 14년)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1433년에 간의대(簡儀臺)가 축조되었고 1434년에 자격루(自擊漏)와 앙부일구(仰釜日晷), 1437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 해시계), 1438년 흠경각(欽敬閣) 옥루(屋漏) 등이 완성되었다.

 

1420년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18년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105 페이지) 세종이 이룩하고자 한 천문학은 바로 원나라 곽수경이 이룩해놓은 첨단 천문학이었다. 찬란했던 곽수경의 사천대는 명나라가 들어서자 운행을 멈추었다. 명나라는 천문이나 과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천문학은 원나라의 천문학을 그대로 답습했다. 과학에서 답습은 퇴보를 의미한다.(116 페이지)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니덤의 말을 인용했거니와 이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천문학에서 퇴보했기 때문이다. 물론 명의 퇴보만이 아니라 세종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니덤은 한국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에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15세기 초는 세종의 프로젝트 덕이고 17세기 초는 인조와 효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양 천문학 전래가 계기가 되었다. 전통 시대의 달력은 역서, 월력, 책력 등으로 불렸다. 이는 오늘날의 달력 이상의 농경 및 길흉화복 등의 정보가 담긴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앞 부분에서 장영실 일행이 명나라에서 보고 온 것이 원나라의 천문기기였다고 했거니와 이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명나라 천문대였다면 경비가 삼엄해 제대로 조사해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133 페이지) 장영실의 임무는 곽수경이 만든 보루각과 흠경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대로 모방하여 제작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천문의기 제작을 총감독한 이천(李?),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한 이순지(李純之),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개발한 장영실(蔣英實)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범 7년만에 완성된 천문 프로젝트도 놀라운 성과였다.(166 페이지) 구루(晷漏)란 말이 있다.(167 페이지) 구(晷)는 앙부일구(仰釜日晷)란 말에서 보듯 해시계를 의미하고 루(漏)는 자격루(自擊漏)란 말에서 보듯 물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구루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르는 말이다.(일구라는 원문 그대로 풀이하면 해 그림자다.)

 

가마솥 시계라는 의미의 앙부일구는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지고 17세기 후반인 현종-숙종 대에 다시 제작되었다.(204 페이지) 경복궁 사정전 앞,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앞, 창경궁 풍기대 앞의 앙부일구는 17세기 후반에 만든 앙부일구 복제품이다. 일성정시의는 ‘주례(周禮)’나 ‘원사(元史)’ 등의 경전과 역사서에 소개된 별을 이용한 시간 측정 방법을 참조하여 세종 대에 독창적으로 제작한 시계다. 낮에는 태양의 운동을 통해,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장치다.(220 페이지)

 

세종의 하늘’은 조선 역사와 과학을 조화롭게 다룬 책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천문학은 첨단 과학이었다. 전기했듯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은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다. 15세기 우리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정체되었다. 이는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의 한계 때문이라 짐작된다. 세종이 우리의 역법이 중국의 역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이 우리의 글이 중국의 글과 달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우리 글을 만들려고 결심하게 된 데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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