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연구원 기획
앨런 스턴,데이비드 그린스푼 저/김승욱 역/황정아 해제
한미경 글/순미 그림
고희정 글/조승연 그림/류정민 역
우에타니 부부 글그림/오승민 역/사마키 다케오 감수
그림과 의학이라니 꽤 기묘한 조합이다. 의사가 쓴 그림 에세이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책이 의학자가 쓴 최초의 그림 에세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중에서 말이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의학이나 몸, 건강 분야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메인에 떴을 때 책 소개를 읽고 꽤나 흥미롭게 보였다. 그림을 두고 의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적절한 주제를 들고나온 것 같다.
그림으로 읽는 의학과 인문학
히포크라테스 미술관
박광혁 저
출판사: 어바웃어북 출판일: 2020년10월30일
한동안 그림과 관련된 책을 몇 권인가 부지런히 찾아 읽어보았다. 살면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특별히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주인공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만화가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훌륭한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림실력이 좋지는 못했다.
아마도 몇 번인가 다른 책을 읽고서 쓴 글에도 밝혔지만, 시립대 김태진 교수의 책을 우연히 읽은 것이 티핑 포인트가 된 것 같다. 책을 통해서만 상상력 혹은 사유의 힘을 느끼고 키울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이 무너진 것이다. 문득, 서구에서 어린아이에게 예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는지. 왜 아이들과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고 보고 느끼게 만드는지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왜 ‘아트인문학’ 서문에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터득한 사람 중에서는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인 박광혁씨처럼 본업을 충실하게 하면서도 틈틈이 각 국의 미술관을 찾아가서, 느끼고, 읽고, 그 안에서 여러 의미와 이야기를 알아가게 된다. (책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었겠지만, 그는 내과 전문의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마도 그가 출간한 몇 권의 책일 것이다.
내과 전문의라는 그의 정체성 때문일까? 그가 그림에서 읽어가는 이야기도 그에 연관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림을 통해서 느끼는 서사와 감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평소에 텍스트가 읽고 상상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며, 시각적인 자극은 사유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림은 시각을 통해서 접하지만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텍스트보다도 더욱 주관적이고 함축적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자신에게 가장 큰 감명을 불러일으킨 그림은 차이가 많을 것 같다. 물론 거기서 느끼고 읽어 내려간 내용도 달라질 것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도가 아닌 이상에 성경에서 모티브를 딴 그림의 의미를 전부 다 온전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독실한 기독교인조차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림을 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은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과 같이 저자가 주관적으로 느낀 이야기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도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은 미술관을 직접 가기 보다는 가끔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녀봤지만, 인문학 도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본 게 십분지 일이나 되었을까 싶다. 2019년에 조원재의 <방구석 미술관>을 시작으로 '모네'와 '마네'를 구분함에 성공했다. 곧 마흔인데 말이다. 그 뒤로 뭔가 더 알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다 박광혁의 <히포크라테스 마술관>을 만났다. 의사이면서 독서와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가 <미술관에 간 의학자> 다음으로 두 번째 펴낸 책이다. 작품 분석을 '의학'의 관점으로 시도한 거라 미술 전공자들의 책과는 읽는 재미가 또 달랐다.
1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룬 7챕터의 제목은 '삶에서 동문서답이 필요할 때'이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는 근대소설의 효시 '돈키호테'를 제대로 읽었다는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데 생각해보니 산초와 풍차, 볼품없는 노새는 기억나지만 돈키호테가 왜 미쳤는지에 대해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완역본은 1,000페이지가 넘는다는데 1, 2편으로 실제 그가 쓴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저작권 때문에 당시 실제 작가가 받은 돈이 너무 적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먹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현'의 의미와 환청, 공상 등에 관한 정신학적 질병의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니, 정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에선 '인셉션'을, 책으로는 '돈키호테'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은 11챕터 '닥터 러브라 불린 남자'에 실린 그림이다. 사라 베르나르는 빨간색 가운을 입은 핸섬가이 닥터 포지의 여자 친구 중 한 명으로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배우다. 자세와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압도적인 눈길이 여배우의 아우라를 뿜뿜하고 있다. 현대의 패션지 표지로도 손색이 없는 구도와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닥터 포지 관련 챕터를 읽다 보니, 아직 쌓아놓고 읽지 못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도 읽어보고 싶다.
사라예보의 오스트리아 태자의 사건이랄지, 예술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랄지 미술사적인 관점 외에 의학의 필터를 끼워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다. 계속 읽고 싶은 책이 생각나게 하는 것도 작가의 역량이지 싶다. 코로나로 미술관에 가지 못하는 미술광들에게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