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해,정지영 공저
장강명 저
안도 유스케 저/이규원 역
[책읽아웃] 책의 뒷면에 있는 사람들 (G. 이연실 편집자)
2021년 07월 08일
에세이 편집자가 에세이 작가가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고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라면을 끓이며』, 『걷는 사람, 하정우』, 『김이나의 작사법』,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들 책 네 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기저기서 들리는 "장르가 모두 에세이다.", "출판사가 모두 문학동네다."라는 소리에 모두 정답입니다, 라고 말해야겠으나 출제자가 원하는 답은 책표지에 있지 않다. 본문을 다 읽은 뒤 남은 마지막 페이지 혹은 책 뒷날개를 젖히면 보이는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책을 편집한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지난 15년간(책 출간일 기준, 올해로 17년차) 에세이 편집자로 일하며 신물나기는커녕 신명나게 책을 만들어오고 있다는 이연실 작가의 첫 책, <에세이 만드는 법>을 다시 만나보았다.
"사실 난 에세이가 싫었다."고 쓰여진 첫 문장을 본 순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이내 끄덕이게 된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에세이를 만드는 사람의 저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서다. 뼛속까지 소설바라기였던 그가 출판사 국내문학팀에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소설·에세이팀으로 옮긴 뒤 지금까지 에세이와 함께해온 사연을 다 듣고나면 저 문장이 가진 반어적 의미가 또렷해지다. 닮은 듯 다른 이유에서 나 또한 서른 전까지 수필보단 작가적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는 소설을 단연코 선호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동시대를 살면서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계속 에세이 곁을 맴돌고 있다.
"일단 여기서 닥치는 대로 해 봐. 그럼 나중엔 네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건 이야기건 다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될 테니까."(10쪽)
예나 지금이나 같이 일하는 털보 실장님이 신입 편집자에게 건넸던 응원이자 유혹의 메시지는 훗날 적중한 예언처럼 저자를 멋진 사람과 잊지 못할 이야기를 한 권의 에세이로 만들어내는 편집팀장으로 성장시켰다. 편집자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차례 구성, 제목, 본문 디자인, 표지 디자인, 표지 카피, 띠지 문안, 보도자료에 이르기까지 책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사람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기에 그는 늘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쟁통에서 불량품이 아닌 뇌관을 준비하고 재미와 감동이라는 도화선을 독자의 마음에 정확하게 연결해 불꽃을 터뜨리는 일(13쪽)'에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 같이 위험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에세이를 만드는 편집자 곁에는 (이따금 적과의 동침을 연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든든한 전우들이 있다. 작가, 디자이너, 마케터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며 그들과 제대로 교감하고 소통해야만 책 한 권으로부터 제대(除隊)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훈 작가와 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어 먹으며 나눈 대화 속에서 '손과 발', '살아온 날들의 기억', '가까운 글쓰기' 등의 예비 제목들을 제치고 『라면을 끓이며』라는 제목이 탄생했다거나, 『김이나의 작사법』에 쓰일 띠지 문안을 놓고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절충안으로 '대한민국 작사가 저작권료 수입 1위'라는 딱지는 한 편에 접어두고 가수 아이유, 윤상 등 추천 아티스트의 이름을 넣어 출간했다고 한다. 또한 한지붕 아래서 일하는 동료 디자이너와 마케터에게 '진상'이 되지 않고 입장 차이를 좁히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저자의 경험담은 직장생활자인 내게 '진'한 인'상'을 남겼다.
교정지 첫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항상 다짐하듯 떠올린다. 지금 내가 만지는 것은 한 사람이 살아 낸 삶이고, 소중히 붙들어 온 기억이고, 때론 용기 내어 꺼낸 상처이기도 하다고.(86쪽)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책을 읽을 때면 글쓴이와 그가 쓴 이야기에만 눈길이 갔다. 그러다 출판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에세이를 만나면서부터 책이라는 세계가 상상보다 크고 넓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덕분에 원고를 고치는 데에 띄워쓰기나 표기 규칙을 점검하는 '교정'과 비문과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을 가다듬는 '교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교정교열과 글에 윤기를 더하는 '윤문'이라는 작업에 작가의 상처와 기억을 뜯어고치지 않고 작가에게 그 상처가 함부로 다뤄지지 않았음을, 독자에게 작가의 소중한 기억이 진정성 있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다.
저자는 편집자와 작가라는 1인 2역을 소화하면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순간순간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에세이를 만드는(편집하고 쓰는) 자의 숙명과도 같이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에세이'라는 장르가 그렇다. 저자의 말처럼 자서전, 인문, 자기계발, 르포, 실용 등 발을 담근 곳이 하도 많아서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에세이의 또 다른 이름은 '잡문'이다. 여타 장르에 비해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는 편견이 담긴 표현에 그는 정여울 작가의 말로 당당히 맞선다. "'잡스럽다'는 것은 반듯하게 그어진 경계나 선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이러한 에세이의 자유로움과 가능성에 매료된 저자(인지 편집자인지는 이제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는 '한정된 독자가 아닌 더 많은 대중에게 두루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보편성과 일상성을 지닌 책'이 바로 에세이라고 재정의한다.
<에세이 만드는 법> 역시 한마디로 소개하기 어려운 책이다. 누군가는 편집자의 일상과 그속에 자리한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거나, 그처럼 에세이 편집자를 꿈꾸는 이에게는 실제로 용기를 북돋아줄 '실용'서로 읽힐 수도 있을 듯하다. 적어도 내게는 에세이 편집자라는 존재를 각인시켜줌과 동시에 '에세이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에세이는 왜 읽어야 하는가'와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준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에세이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대로, 경험한 만큼 쓰이는 글이 에세이다. 삶이 불러 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숙성시켰다가 작가의 손이 자연스레 받아쓰는 글이 에세이다.(13쪽)
#에세이만드는법 #이연실편집자 #유유출판사 #책읽아웃
『에세이 만드는 법』은 굉장한 책이다. 나처럼 종이책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이 책은 출판계 스타 편집가 이연실 저자가 썼다. 제목, 띠지, 보도자료, 저자와 소통, 마케팅 등 책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를 다룬다. 이연실 저자가 쓴 책과 함께 작업한 사람의 면모가 화려하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김이나 『김이나의 작사법』, 최규석 연상호 『지옥』 등등. 저자 분과 직접 뵌 적은 없으나, 먼 발치에서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니, 그 생각이 맞았다. 난 사람이다.
일하기 싫다, 파이어가 내 꿈이지, 로또 1등 언제 걸리나(요즘은 안 사고 있지만)를 입에 달고 있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업에 관한 정의를 잘 내리고 실천하는 사람이랬다. 이연실 저자가 그러하다. 편집자, 그중에서도 에세이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해야 하는지를 『에세이 만드는 법』에 농축했다. 나, 조금 부끄러워졌다. 좀 더 재밌게,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더랬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이다.
종이책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방어적 비관주의로 쏠린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거다. 잘 안 되겠지, 1쇄 못 넘기겠지, 종이책 시장이 성장하겠어, 누가 요즘 책 봐 넷플릭스 보겠지 등등.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여전히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에세이 편집자의 역할 중 하나가 생활예술인을 발굴하는 거라고 하는데, 동감한다. 무한한 데이터가 인터넷에 쌓이는 시기, 종이책이 담당했던 지식 전달이라는 역할은 많이 사라질 테다. 대신 생활예술인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공감, 통찰은 종이책이 우위다. 심지어 영상보다 우위다. 영상을 잘 만들려면 엄청난 자본과 인원이 필요한데, 종이책은 그렇지 않거든. 저자와 편집자에게 시간과 고통이 동반될지언정, 영상보다는 가성비가 훨씬 유리한 매체다. 물론 그렇다 보니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 읽는 사람은 적은데 쓰고 싶어하는 사람만 많아진 측면도 있긴 하지만. (『밥보다 등산』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했지 않냐고 말한다면, 그래도 산행기 중에서는 꽤 괜찮지 않았냐고 변명해본다.)
일하며 겪는 다양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저자, 마케터, 디자이너와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합심하여 밀고 나가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에 비해 서점이 돌아가는 방식은 몹시 삭막하다는 느낌. 그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역시 김언수 작가님이 등장하는 편. 궁금하면 책을 보시라. 역시나 김언수 작가님은 소설도 소설이지만, 그냥 썰을 잘 푸신다. 그밖에 셀럽이라고 무조건 작업하지 않는다, 셀럽의 팬 수보다는 그 셀럽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라는 뚝심도 멋있었다.
아직 2022년이 세달이나 남았지만,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중 무조건 Best 5 안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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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편집자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뜻밖의 기적'이 일어날 확률과 가능성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장르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도 나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독자의 가슴에서 터지길 고대하며 책장 여기저기에 뇌관과 도화선을 깔아 놓는다. (13쪽)
앞으로 이 책에서 나는 끊임없이 '팔리는 에세이', '독자에게 선택받는 에세이'에 대해 말할 것이다. 어떤이는 그것은 편집이 아니라 마케팅의 영역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마케터는 결국 그 책'이라는 출판 시장의 오랜 잠언을 믿는다. 특히나 매일 엄청난 종수의 신간이 쏟아지는 만큼 매대 회전율도 빠른 에세이 시장에서 출간 초기에 책이 스스로 강력한 마케터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자리 잡게 하는 일은 결국 편집자의 몫이다. (28쪽)
띠지 문안은 편집자의 간판이다. (중략)
그러나 유일하게 내가 작가의 마음을 2순위로 미뤄놓는 영역이 있으니, 바로 띠지다. 띠지는 출판사와 편집자의 광고 영역이다. 나는 띠지는 작가보다는 독자의 마음에 들게 쓰려 노력한다. 아니, 일단 독자의 '눈'에 들게끔 쓴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러다 보니 이 휘황한 네온사인 광고판을 만드는 시점에서는 작가와 종종 부딪친다. (46~47쪽)
책을 파는 일, 특히 에세이를 판다는 것은 과격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제 삶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작가의 경험과 삶 가운데 가장 예민하고 잊을 수 없는 부분을 내다 팔아야만 한다. (53~54쪽)
에세이 편집자가 디자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쁜 태도는 아무 생각도, 의견도, 제안도 없는 것이다. (65쪽)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내가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 생각하며, 일에 자기 자신을 걸지 않는 사람은 일할 때 감정 소모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화내는 디자이너, 화내는 마케터, 화내는 작가, 당장은 까다롭고 불편한 이야기일지라도 길게 보면 서로의 작업을 위해 확실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까놓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줄곧 좋아했다.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