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요즘 들어 많이 들리는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아렌트 관련 서적들을 조금씩 읽어가며 가장 궁금한 현대철학자이기에 망설임 없이 읽은 책이다. 물론 그녀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거부했지만.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그래픽 노블로 아렌트 일생의 세번의 탈출을 분기로 삼아 그녀의 삶과 사상을 설명한다. 독일에서의 탈출(첫번째), 파리에서의 탈출(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탈출은 물리적 탈출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기존 철학 사상을 탈피하고 나와 그녀만의 생각을 찾아가는 앞선 두 번의 탈출과는 결이 다른 탈출의 의미를 나타낸다.
어렸을 적부터 많은 일에 의문을 가졌고, 책으로부터 때로는 질문으로부터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던 한나는 히틀러 치하, 유대인 핍박이 시작되던 시기, 아버지의 친구 시온주의자의 부탁을 받고, 도서관에서 여러 신문을 통해 유대인 탄압의 증거를 찾다가 나치 SA 장교에게 붙잡혔다가 가까스로 풀려나 독일에서 탈출해, 파리로 간다.
독일에서의 모습과 달리 파리에서는 본격적인 행동가로써, 어린 유대아이들을 외국으로 탈출 시키는 일을 하던 중, 독일에게 물들어버린 파리는 독일인을 가두고, 그중 유대인을 수용소에 사실상 감금한다. 하지만 여전히 오락가락하던 정치 상황 중에서 그녀는 파리를 탈출, 가까스로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누구도, 아렌트 본인조차 믿지 않았지만, 결국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고, 아렌트는 어떻게 독일이 그토록 망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또한 학살로 인한 승리였고,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전체주의 지도자들의 짜맞춰진 거짓말로, 경멸의 메시지를 쏟아내며, 그 사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선동하는 사상에 대한 "전체주의의 기원". 그리고, 그 전체주의를 질식하게 만들 인간의 탄생성과 복수성에 대해 쓴 "인간의 조건". 그리고 철저하게 사유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등 스스로를 더이상 철학자가 아닌 정치 이론가라 명명하며, 그녀는 많은 저작물과 수많은 토론으로 그녀의 생각을 피력하는 삶을 살아간다.
철학을 모르는 한 사람으로 이 책은 그래픽 노블이지만, 여전히 그녀의 사상은 어려웠다ㅠ.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말했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유하는" 삶을 살았던 정말 열정적인 사상가였다는 점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삶을 읽는 것 만으로도 숨이 가쁠정도 였으니.
추천! 진짜 추천!
"여러 아이 중에서 한 아이가 내 눈에 띄었다. 나탈리 파르카스라는 12살짜리 루마니아 고아였다. 내게 보이는 건 그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부재였다. 내가 구해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그 아이의 형태로 남게될 구멍말이다." p.105
" 철저한 사유의 고통보다 순종의 평안함을 바라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공포에 도달하게 된다"(229)
철학자 한나 아렌트, 독일계 유대인인 그녀는 나치의 위협 속에 프랑스로 이주하지만 국외 사람들을 한곳에 가둬 놓는 순수 프랑스인 정책에 의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7개월 가량 집단 수용소에 생활하면서 독일도 아닌 프랑스에 갇혀 지내게 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철저한 사유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 잠시잠깐 수용소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한다. 한나 아렌트는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그밖 사람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독일의 나치에 의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한다.
프랑스 수용소에 가까스로 빠져나온 한나 아렌트는 목숨을 건 유럽 탈출을 시도한다. 프랑스 경찰의 지독한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관련 책을 지독히 읽어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프랑스 책을 통해 프랑스 경찰의 움직임을 머릿 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리스본에서 미국행 배를 타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미국에서도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따가운 시선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지독한 사유의 결과물이 대학에서 인정받으면서 그동안의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저작이겠지만 사유의 농축된 결과물이 녹아져 있는 책을 섣불리 접하다보면 겁에 질러 포기할 수 있다는 한나 아렌트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에 비추어 보아 처음에는 그녀의 평전을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전체주의의 기원 』을 읽어내야겠지만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한나 아렌트, 세번째 탈출 』을 추천한다.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된다.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를. 슬픈 진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것이다."(228) 독일의 나치 선봉주의자 아이히만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파멸해 갈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유대 지도자들을 말한다. 전체주의의 어두운 진실이다.
죽을 때까지 깊이 있는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단숨에 이해하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녀가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 사유하지 못한 죄, 전체주의의 거짓을 꼭 한 번씩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와의 인연을 생각해본다.
석사 시절 악의 평범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한나 아렌트를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마냥 여성 사회학자가 반갑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한나 아렌트에게 호감이 갔었다. 그러나 점점 한나 아렌트의 문장을 접하면 접할수록 사유의 깊이에 완벽하게 도달하지 못함을 반성하기도 하고, 천재성에 감탄하게 되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학자들이 몇 명 있는데 에리히 프롬, 지그문트 바우만 그리고 한나 아렌트다.
이런이런 것이 아닐까 감각적으로 느끼는 깨달음을 언제나 한나 아렌트는 미처 생각지 못한 문장으로 내 눈에 확인시켜주었고, 그것들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되었다.
죽음과 탄생.
탄생과 죽음.
죽음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뒤, 더 정확하게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언제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는게 가끔 지루할 때도 있었고, 괜한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과연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죽음은 어떠한가, 사회와 국가의 죽음은 존재하는가. 이렇게 죽음에 내포된 수많은 의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연애과정에서 죽음에 곶힌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물론 훗날에 죽음과 반대로 '탄생성'에 그녀 나름의 사유에 방점을 찍으나, 죽음을 기억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유를 하게 됨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한편으로 죽음이라는 말이 우리의 세계를 가볍게 떠돌아 다니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모든 질문과 사유들 또한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된다. 그러나 그럴 순간이 올 때는 한나가 이야기한 탄생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삶을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매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매순간은 결국 꽃봉우리가 터지듯 시간속에 끊임없이 피어나고 그 때 그 때 탄생의 아름다움을 직면해야 한다. 누군가는 즉흥적으로 또는 그것이 쾌락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분명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들을 배경으로 탄생한 한나의 절대 즉흥적이지 않은 즉흥에 대한 사유의 결과 물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살아왔으며, 그곳으로부터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발터 벤야민이란 너무나 아까운 친구의 탈출 실패를 경험한 그녀는 말그대로 산전수전공중전 겪으며 말은 사유라고 하나 온몸으로 체험하고 경험하며 쥐어짜낸 글들을 발표했다.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나의 문장들을 가슴아프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왜 저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왜 저런 생각을 할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결국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왜 이제까지 한나 아렌트의 인생을 진지하게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악의 평범성에 대한 한나의 결론은 사유하지 않음이 결국 악이라는 것이었다.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선생님들에게 욕하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꽤 많이 만나고 있다. 나는 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사는 인간임을 인정한다.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태도는 아이들을 너무 풀어주는 것 아니냐는 질타를 받을 때도 있다. 때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아이들의 행동을 마주할 때면 실망을 느낄 때도 있다. 이 사회는 도대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와 관련해 회의적인 질문들이 많이 들 때 즈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이듯, 생각하지 않는 자 또한 모두 유죄다.
사유가 습관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생물학적으로 사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아직 덜 발달된 까닭도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타인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전혀 던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는 악을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요즘 입버릇처럼 붙이고 사는 말이 '잠깐 생각을 먼저 좀 해보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스스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많은 것들이 치유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음이 사실 계속해서 애가 타고 안타까울 뿐이다.
한나의 일생을 읽고 나니 그녀가 왜 사유하지 않는 것이 결국 악이라고 주장했는지 더욱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했고, 타인과 대화하며 타인의 사유까지도 이해했으며, 책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작가의 사유도 자신의 것으로 포섭했고, 음악가의 음악들까지도 사유의 범위 안에 포함시켰다.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누린 덕분에 시대를 흔드는 저작들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뷰어에 도전했다가 떨어졌던 책이다. 그렇지만 굴하지 않고 사서 읽을만큼 한나 아렌트는 분명 내게 매력적인 작가이자 학자였다. 읽고 나니 더욱 후회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가 좀 더 유명해지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0여 년 전이다. 지적 허영심에 목말라 있던 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은 이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한길사에서 나온 두툼한 양장본은 딱 봐도 뭔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악의 평범성’이라니. 너무 많이 불려 지금은 식상할지 모르지만,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생각하지 않는 죄.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악당들은 영화에나 존재한다. 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생각하지 않는 ‘나’가 아닐까라는 생각.
그렇게 첫 만남을 가졌다면 참으로 이상적이겠지만. 10년의 시간, 3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아이히만과 아렌트는 여전히 책꽂이에 잠들어 있다. 그나마 대중서로 썼다고 알려진 책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으니,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인간의 조건>은 당연히 손도 못대고 있다. 아마도 당분간은 힘들지 싶다.
운 좋게 조직에, 관료제라는 틀에 속하면서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와 ‘악의 평범성’은 나의 경고등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원전은 읽지 못했다. 그래서 집어 든 책이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책을 읽을 때 제목 다음으로 보는 부분이 목차가 아닌 저자 소개다. 이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썼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저자 소개로서 손색이 없다.
슬슬 10년의 먼지를 걷어 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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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나? 로마니셰스의 슈트루델이요. 진지하게 말해주게. 던져짐이요 알버트. 평범한 독일말로 부탁하네. 우린 이 세상에 던져진 거예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이요. 우린 지금 이 순간으로 던져진 거예요. ... 우리에게 던져진 모든 것들의 의미는 동등해요. (p.61~62)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인생을 헤쳐나가려면 과거를 예측하고, 미래는 잊어버리는 법을 배우라는 거예요? p.103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p.228
세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유일한 진리나 이해를 위한 묘책 같은 건 없다. 영광스럽고 결코 끝나지 않는 난장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끝없는 난장판 말이다.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