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 저
사피 바칼 저/이지연 역
존 브룩스 저/이충호 역/이동기 감수
프레데리케 파브리티우스,한스 하게만 공저/박단비 역
<총, 균, 쇠>에서 대륙의 모양이 인류의 발전에 미치는 매커니즘을 처음으로 조명했다. <총, 균, 쇠>는 인류가 역사시대 속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때로는 멸망하는지를 연구하는 새 지평을 열게 되었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피엔스>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을 수 있는 믿음, 어쩌면 능력이 인간을 이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오리진>은 인류의 역사를 뒤쫓는 또 한편의 대서사이다. 다만 이번에는 땅 위의 존재로부터 시간을 추적하지 않는다. 되려 땅 속의 존재. 지구의 깊숙한 맨틀과 지각의 거대한 불덩어리에서 시작되는 역사를 탐구한다.
빅뱅으로부터 우주가 만들어지고, 다시 수십 억 년의 시간이 흘러 우주로부터 나온 수많은 먼지가 뭉쳐 항성과 행성을 이루었을 때. 그 먼지의 소용돌이가 오늘날 땅 속의 무수한 물질로 변화할지 누가 알았을까.
<오리진>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 즉 지질학의 관점에서 인류를 탐구하는 색다른 책이었다.
어쩌면 <총, 균, 쇠>에서 다루었던 대륙의 모양 또한 지질학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초의 거대한 판게아 대륙이 점차 그 아래의 멘틀의 대류에 의해 이동하며 현재의 대륙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대륙의 동서 길이와 남북 길이에 의한 기후 차이, 그로 인한 재배 가능 작물의 변화 또한 결국 지질학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설명된다. '땅'으로 인한 기후 차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황하 문명에서 밀과 쌀을 재배하는 것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험준한 지형은 당시 아프리카 초원을 살아가던 인류의 옛 조상들을 분화시키기에 이른다. 보다 원시의 모습에 가까웠던 그 존재들이 가까스로 산과 계곡을 지나 호수에 정착했을 때, 호수의 수위가 변화한 것은 그들이 다양한 작물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이는 결국 보다 큰 뇌 용량을 지닌 존재로의 진화를 이끌어 냈다. 여기에는 동아프리카 열곡을 다른 맹수들은 쉽사리 드나들지 못함으로써 우리의 선조들이 보호 받을 수 있었던 까닭도 크다.
'땅'의 존재로 인한 고립은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누군가의 역사에는 큰 영향을 준다. 프랑스와 좁은 바다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영국인들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미끄럼틀 위에 놓여 있던 구름다리처럼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던 육지에는 간빙기와 빙하기가 반복되며 점차 엄청난 양의 물이 고익 된다. 거대한 호수는 결국 붕괴되어 꽤나 길었던 그 '구름다리'를 마침내 끊어버리게 되었고 영국은 스페인이 한창 형님 행세를 할 때에도 별다른 침략없이 조용히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만약 도버해협이 38km보다 조금 더 길거나 짧았다면, 아니 영국과 프랑스가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 옛날의 대영 제국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누가 과연 이러한 생각을 하겠냐 물을 수 있지만, 그렇기에 지질학이라는 색다른 학문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무척 미묘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동의 사막 국가를 황금의 땅으로 만들어준 존재, 검은 물.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에너지원인 화석 연료는 철저하게 지질학적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석유 이전에 인류의 동력원이었던 석탄은 실제로 '석탄기'라 불리는 지질 시대에 주로 생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같은 석탄기라고 해서 전 세계에 걸쳐 모든 지역에 골고루 석탄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인적 자원만이 살 길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 흔하다는 석탄마저도 다른 국가에 비해 매장량이 적거나 매장 위치가 불리하지 않은가. 석탄기에 석탄이 많이 만들어진 까닭 또한 지질학에 있다. 당시 대륙의 구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때문에 적도와 극지방의 열 순환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식물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기후의 한랭함을 불러일으켰다. 석탄이 쌓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느끼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수만 년 전 땅의 움직임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후로 인한 재배 작물의 차이, 재배 작물의 차이로 인한 인구 구조의 차이, 그로 인한 문명의 차이는 다양한 책에서 많이 다뤘기에 조금은 익숙했었다. 하지만 지질학적 구조로 인한 인류의 역사는 낯선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기후 또한 결국 땅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었다. 지구라트가 지어진 지역의 건조한 기후 또한 수만 년에 걸친 땅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었고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피땀 흘리게 만들었던 비옥한 농토와 기후 또한 바다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결국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땅과 올려다 보는 하늘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간의 삶을 만드는 위대한 자연이었다. <오리진>을 통해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또 하나의 존재, 땅 밑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전 2015년 충북 단양의 수양개 6지구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자루가 있는 돌칼)가 최고 4만6000년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이곳은 우리나라 대표적 구석기 유적인데, 이번에 발굴된 슴베찌르개는 지금까지 발굴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연구진은 한반도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후기 구석기인들이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는 게 설명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다. 이 기사를 볼 때 나는 마침 루이스 다트넬의 <오리진>을 읽고 있었다. ‘지구는 어떻게 우리를 만들었는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는 동아프리카에 30만~20만년전 나타난 호모사피엔스가 6만년전에 동아프리카를 떠나 이주를 시작했다고 본다. 이들은 5만~4만5000년 전에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도착했고, 2만년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건너갔다고 봤다.(73page) 이 추론이라면 5만년전 중국에 들어온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일부가, 동남아시아로 가기전 아주 빠르게 충북 단양에 온 셈이다.
사실 몇 년전의 역사도 불명확한데, 4만6000년전을 가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연구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물론 학설에 따라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10만년전부터 이주를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탄소연대 측정이 정확해 4만6000년전에 단양에서 활동했을 선조들의 모습은 정말 궁금하다.
이런 관심으로 이끈 책 <오리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을 들고 나는 서문에서부터 흥분했다. 한 문장 때문이다.
“우리 몸속의 물은 한때 나일강을 흘러갔고, 몬순의 비가 되어 인도에 떨어졌으며, 광대한 태평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리 세포를 이루는 유기 분자들의 탄소는 우리가 먹는 식물을 통해 대기 중에서 흡수한 것이다. 땀과 눈물에 들어있는 염, 뼈 속의 철은 모두 지각의 암석에서 녹아나왔다. 머리카락과 근육의 단백질 분자들 속에 들어 있는 황은 화산에서 튀어나왔다.”
이 글을 읽으면 우리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계가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수많은 연대기를 거쳐서 형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진 DNA가 수많은 정보를 가진 정보에 비해, 우리를 구미는 수많은 물질들은 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구와 인류 등 생명체는 물론이고, 제목처럼 사물이 구성된 기원을 하나하나 풀어준다. 지구의 탄생부터 수많은 변화 속에 만들어진 물질과 생명체의 신비는 경이 그 자체다. 만약 동아프리카에 적당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처럼 지능이 매우 높은 호미닌(인간의 조상으로 분류되는 종족)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판의 구조 환경으로 만들어졌고, 판의 변화에 따라서 호미닌들은 세계로 뻗어 나갔다고 본다.
2장서는 사피엔스의 이동을 이야기한다. 앞서 말한 사피엔스의 세계 분포도 여기서 설명된다. 결국 11만 7000년전에 시작된 마지막 빙기에 전세계 해수면이 최대 120미터까지 낮아져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덕분에 걸어서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인류가 퍼질 수 있던 것이다. 물론 사피엔스 이전에도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이 있었지만 이들은 여러 이유로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만이 인구의 강자로 남게 된다.
이후 가축이나 식물 등의 흐름을 보여준다. 4장 ‘신드바드의 세계’는 지중해에서 동아시아에 오는 길의 특징 들을 통해 지역에서 생존 환경이 형성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준다. 지금도 미국에서 정당 투표의 결과는 과거 형성된 비옥한 토지인 블랙 벨트와 일치한다는 재미있는 분석도 있다.
이후 석재나 금속, 석탄, 석유가 인류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풀어낸다. 세상의 모든 철은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어졌다면서 ‘철은 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소이다’라는 비감한 표현도 흥미로웠다.
실크로드나 해상항로 개척을 통한 인류의 이동도 상세히 풀어낸다. 지구 대기에 대한 지식이 약해서 수시로 혼란스럽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를 만든 지구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앞 부분에 설명했듯 인간의 시간은 전 지구의 수명에서 찰라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문명의 전체 역사는 현재의 간빙기에서 잠깐 동안 반짝이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잠깐 동안 기후로 안정된 시기에 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의 험한 산악 지형이 민주주의를 태동시켰다고 봤는데, 이는 앞서 쓴 <송나라의 슬픔>의 저자랑도 같은 관점으로 보인다. 문제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자만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내 존재에 관해서도 많은 성찰을 해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