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델리아 오언스 저/김선형 역
이미예 저
천선란 저
허지웅 저 저
2020년 10월 05일
이별은 존재의 원풍경
당신은 사라지면서 대기가 된다.
나는 숨을 쉬고 그 대기를 마신다.
당신을 들이마신다. (84쪽)
<아침의 피아노>와는 성격도 인상도 다른 책이었다. 지독한 사랑앓이 없이 지나온 반백년의 생이 원망스러워진다. <이별의 푸가>를 읽는 내내 자괴감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던가. 사랑이 남녀의 이성애적 감정과 연애만을 지칭하는 것은 단연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 들렸다. 너는 얼마만큼 너를 내주고 내려둬 봤니? 자꾸 묻는 것이다. “음악마저도 그저 부재의 울림이고 흔적일 뿐(215쪽)”인데 인생 곡曲이 얼마나 되는지 털리는 기분.
삼월 한 달 동안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사람들과 묻고 답하며 감상을 나눴다. 하루키 고유의 문학 세계를 떠나 지난 세월, 문학, 특히 창작 영역에서 여성이 펜을 쥔 남성에 의해 얼마나 빈약하게 일방적으로 때론 왜곡되게 성격과 특성이 부여되어져왔는지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남성 인물들의 고독과 불안을 말하는데 소모되어온 여성의 자리가 뭇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시대적인 한계를 떠나 하루키의 소설이 전하는 철학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특정 이미지를 덧씌우는 게 어디 하루키만의 실수요 문제겠는가. 그런 연유에서인지 김진영의 <이별의 푸가>를 들으며 소설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불쾌한 감정을 뒤로하고 보다 뚜렷한 메시지를 매만질 수 있었다. 거듭해 잡히지 않는 정체와 의미를 향해 한발 더 다가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문학뿐 아니라 철학도 철저히 남성 중심의 시선과 목소리로 점철되어왔다는 씁쓸함이 뭉쳤다(고인께는 죄송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를 잃고 더욱 선명해진 그녀의 존재를 파고드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고 세상에 널렸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읽고 감명 받고 되새기는 독자도 상당 부분 여자였으리라. 알게 모르게 남자의 눈과 입에 길들여지고 채워지고 남자의 입김과 터치에 의해서만 생명을 갖게 된 여자들과 그녀들의 사랑. 사랑과 애도와 부재에 대해 말한 철학자들도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다. 마음을 끄덕이며 듣다가도 저 멀리 외따로 떠도는 여자의 실체가 아른거려, 여기 있는 것은 그녀가 벗어둔 허울이고 환영들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바람직한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찌된 영문인지 필립 로스의 작품을 통해 남성의 에고와 집착을 알아보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이언 매큐언과 줄리언 반스의 분신들을 거쳐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성적 판타지를 살펴보았듯이 하루키와 김진영의 책도 소화했다. 그들이 말하는 에고 집착과 창작욕에 나를 구겨 넣으며, 그들이 모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중도에 내리지 않았다. 베냐민은 독서는 쓰여 있지 않은 걸 읽는 일이라고 했다. 물살을 가르며 떠내려가는 것들 중에 이별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를 건져냈다. 상대의 떠남으로 텅 비어버린 존재는 과거만 아는 육체의 ‘보챔’에 할 말과 밖으로 나갈 생의 의지를 잃고 갇힌다. 그 안에 새겨진 여자의 체취와 기억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남자는 무덤 같은 침대(공간)를 사수한다. 그녀는 없지만 모든 곳에 스며있기에.
그 시달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골방에서 상처를 핥으며 아주 가깝지 않은, 영혼 교유가 차단된 제3자를 곁에 두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훈기에 자신의 아픔을 잠시 잊고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에 어설프게나마 살아있을 수 있다. 현실 세계의 현재를 사는(누리는) 존재들은 여자들뿐이다. 그녀에게 그는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있고 그리로 환승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대리 운전수를 조수석, 아내의 자리에 놓는다. <예스터데이> 제목이 암시하듯 남자들에게 애상과 회한과 멈춰버린 시곗바늘만 남는다. <독립 기관>에서는 여자의 정체와 무관하게 남자는 그 사랑을 진공 상태로 두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처럼 자신을 가두고 식음을 전폐한다. 아니면 베르테르의 키스와 자살이거나. 시선과 목소리, 그리고 육체와 말을 잃은 주인공에게 <셰헤라자드>는 그가 연명하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익명의 대상이다. 그의 에고가 사수되어야 하니 너무 진지하거나 순수한 관계여서는 안된다.
<이별의 푸가>를 읽으며 하루키의 소설들 사이에 흐르는 공통 주제를 발견했다. 음악의 선율이 되어 연주되는 분명한 음표들이 있었다. 무대 장치 위 배우처럼 다소 인위적이기는 하나 상상력을 발휘해 이별 이후의 성향(회피와 침묵)을, 부재와 단절과 고독의 집을 꿋꿋이 짓는다. <기노>에서는 상처 입은 한 남자의 되돌릴 수 없는 헤어짐과 ‘비의의 진실’을 깨우치는데 온 우주가 동원되는 신묘한 기운이 감싼다. 혼자서 살아가는 인생이나, 자기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누군가는 끔찍했을 셰헤라자드의 칠성장어 이미지도 다음 속성 때문에 되려 흥미로웠다. 그녀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이 아닌 추억의 통칭이 아닌가. “그때 추억은 매복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한다. 어느 거리, 어느 장소, 어느 소리, 어느 물건 속에 숨어 있다가 급습한다(36쪽).” 읽기 파트너들이 가장 좋아한 <기노>는 폭우에 떠밀려서라도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울 수 있는, 우리에게 절실한 미Me타임을 말해준다. “부재는 친숙한 일상이 된다. 실재라고 외쳐대는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들로부터 나를 숨길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도피처가 된다. 그렇게 부재가 부재해서 안전지대가 된다(113쪽).”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카프카의 벌레로 말라죽은 잠자가 두발 직립보행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가족이 아닌 그가 살아남는다. 이런 역전에서 그가 기대는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예스터데이>의 얼음달의 의미를 다른 소설들과 이어보며 파악하게 이끈다. 육체를 나누며 진하게 사랑할 때 그것은 비순수해진다. 이것은 철학자 김진명의 말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열네 살의 순정을 지우개 반쪽과 환한 미소로 되살리며 추억하듯이, <예스터데이>의 연인도 몸을 나누지 않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수순을 밟지 않았기에 얼음달로 여전히 출렁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과거지만 여전히 현재로 기억될 수 있는. 영원히 녹거나 지지 않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별은 이미 시작된다. 이 메시지를 하루키는 소설집에, 김진명은 단상으로 엮고 풀어내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문장에서 비어버린 여자의 단어들이 못내 궁금해지면서, 역으로 남자(남성 창작자)의 입장과 에고를 좀더 치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현장에서 터득하지 않고 책으로 배운 내용들이지만 헛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저것 재차 두리번거려야 하는 피곤한 현재(의 독자)지만 곁눈질하며 중얼거릴 수 있어 다행이고 지나온 시간들이 만든 오늘에 감사한 마음도 싹튼다.
그러나 나는 또 안다. 나는, 더 깊은 곳의 나는, 이별의 주체인 나는, 오르페우스도 오디세우스도 되려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 깨어서도 꼼짝도 않고 깨어난 자세 그대로 꿈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시 꿈속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거기에서 그 사람 곁에 누우려고 한다. 마르셀의 어머니처럼. 돌무덤으로 걸어가는 안티고네처럼: “오 돌무덤이여, 나의 신혼방이여, 나는 여기에서 그대 곁에 눕는다...” (32쪽)
나 또한 그렇다. 나도 추억의 통점이 내 몸속에 더 깊이 못 박히기를 바란다. 그 통점은 나의 장기가 되어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니까. 그 통점이 사라지면 그 사람도 영원히 나의 상관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 (39쪽)
하지만 이별의 주체는 해동의 주체이기도 한 걸까. 어느 날 나는 차가운 그 사람을 떠올린다. 냉동 인간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어느 겨울날의 그 사람을 기억한다. 너무 추워요, 몸이 꽁꽁 얼었어요, 라고 말하면서 겨울바람 속에서 떨던 그 사람. 내가 코트 안에 꼭 감추어주었던 그 사람. 이제 다 녹았어요, 라고 말하던 그 사람... 나는 차가운 그 사람을, 냉동 인간을, 다시 꼭 껴안는다. 따뜻하게 덥히려고, 부드럽게 녹이려고... (92-93쪽)
아도르노: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건 최초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이는 반복 행위에 스스로 지쳐버리거나, 금지가 너무 크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그렇지만 대답을 얻을 수 없었던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 딱딱하게 굳은 상흔이 남게 된다. 동물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눈 먼 지점, 희망이 정지된 지점들이 있다. (97쪽)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다 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나의 에고를 완전히 버리는 일이다. 에고를 조금이라도 남겨 가지면, 나는 그 사람을 아프게 하고 만다. 에고는 항상 자기를 주장하니까. 그 주장과 맞지 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게 에고이니까.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이 말은 사랑은 에고를 모조리 폐기시키는 일이다, 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99쪽)
그러나 또 하나의 말들이 돌아온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했던 사랑의 말들이다. 당신이 온몸을 열고 들어주어서, 당신의 몸속으로 들어가 저장된 나의 말들. 당신은 떠나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내 사랑의 말들은 지금도 당신의 몸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의 말들이 내 몸 안에 들어 있듯이.
그리하여 너무 외로울 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도 갈 곳이 어디에도 없을 때, 나는 나의 말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당신의 육체 안에서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온기, 냄새, 촉감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내 사랑의 말들을. 나는 그 말들을 꼭 껴안는다. 그 말들을 만지고 냄새 맡고 느낀다. 그리고 어느 사이 달아오른 몸으로, 당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107-108쪽)
요즘 일련의 주제를 갖고 독서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 사랑에 대한 책에 대해 알아보다가 이 책의 일부를 알게 되었고 결국 구입하기에 이르렀군요. 아주 짧은 한 문장에 반해서 산 책 치고는 굉장히 잘 읽었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습니다. 다만, 요즘 책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격에 비해 활자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아쉽다는 마음도 같이 느꼈습니다. 빽빽한 책은 절대 아니고 매우 널널한 책입니다.
결핍 : 부재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부재. 당신이 떠났으므로, 당신이 더는 내 곁에 없으므로 남겨지는 공백이 있다. 마치 내 서가에 있던 한 권의 책을 누군가 가져가면 그 책이 남기는 텅 빈 자리처럼. 이 경우 당신의 부재는 `없음`이다. 또 하나의 부재, 당신을 여전히 욕망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여전히 애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재. 이 부재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부재이다. 나의 욕망과 애착이 만들어 놓은, 그러나 채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으로 존재하는 부재.
세월 : 오늘 같은 날, 햇빛이 너무 따뜻하고 맑은 날, 거리의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 걸어가는 여자의 종아리가 투명한 날. 나는 그만 펑 눈물이 터지고 말아요. 지나가도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라고 나는 말했었죠. 아니에요, 지나가면 사라져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당신은 말했었죠.
비극 : 우리가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생의 어느 특별한 비의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의의 진실을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떠난 사람을 다시 그리워하는 건 그 진실을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없고 그가 가르쳐준 비의의 진실만이 혼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사랑과 세월 사이의 비극이다.
멂과 가까움
당신의 부재 앞에서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건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상태일까. 나는 당신에게 매달려 있지만, 당신은 나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장 뜨거우면서 가장 차가운 사람이다. 나의 머리는 온통 당신으로 가득해서 터질 것 같지만.....
계속 곱씹게 되는 문장입니다.
아침의 피아노라는 제목의 유고집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이 책도 구매했습니다.
한없이 개인적일 수 있는 감정들이지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이별에 대한 단상을 기록한 문장.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 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는 이별에, 우리는 불에 화상을 입은 듯 너무 놀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태어남과 죽어감이 매순간 일어나는 자연의 원리인것을.
아프지만, 누구나 다 그렇다고.
나도 그렇고, 당신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며 언젠가 생과 이별하는 순간이 있다고 따듯하게 어루어만져주는 문장들이었다.
김진영 작가의 이별의 푸가 입니다. 전작인 아침의 피아노도 참 잘 읽었었는데.. 이별의 푸가도 참 마음 아프게, 따뜻하게 잘 읽었습니다.
배 속에 남는다. 그 사람은 사랑이 끝났어도 나의 타인이 아니다. 내 몸속에서 살아가는 장기, 숨 쉴 때마다, 먹을 때마다 내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내 유기체의 한 부분이므로 추억의 습격이 적중하는 지점은 이 지점이다. 매듭이 맺어지는 장소는 바로 이 장기이다. 습격당하는 아픔, 그건 몸속에서 장기가 꼬이는 아픔이다. 그때 나는 바르트를 이해한다 : "나는 그 사람이 아파요"